내 맘에 남는 우리 노래

휘버스의 결성 배경부터의 역사

아름다운 안해 2007. 4. 1. 02:25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출처 블로그 > 경계선에서
원본 http://blog.naver.com/hyssjang/140016356587

 

 

휘버스프로필

 

1975년 서울 배명고등학교 친구들이 10월 경주 수학여행을 계기로 그룹사운드 결성

 

(멤버 : 보컬 이명훈, 키보드 정원찬, 베이스 문장곤)

 

1978년 2월 이명훈, 문장곤, 정원찬, 후배 송용섭등이 주축으로 5인조 휘버스 결성

 

          3월 불멸의 명곡 정원찬 작사/ 작곡 그대로 그렇게 탄생

 

          4월 새로운 기타리스트 김흥수 영입

 

1978년 7월 제1회 TBC 해변가요제 출전 정원찬 작사/곡 그대로 그렇게로 인기상수상

      

          8월 해변가요제 공연실황 앨범 발매

          

1978년 12월 휘버스 첫 단독 콘서트 (남산 드라마센터)

 

1979년 기타리스트 김흥수 대신 박호준 영입

 

1979년 휘버스 독집발매 콘서트 (정동 문화체육관)

 

1980년 휘버스 고별 콘서트

 

 

 

문장곤 (베이스기타)

 

방송국 음악 및 음향제작, 음반제작, 녹음 스튜디오 운영

 

2004년 열린음악회를 계기로 보컬 이명훈님과 함께 휘버스멤버로 활동

 

현재 송골매 프로젝트에서 활동중

 

정원찬 (키보드)

       

미국 Arkansas, Louisiana에서 Computer Science 전공

 

2004년 열린음악회를 계기로 7080콘서트에 휘버스 객원멤버로 활동 

 

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위성관제기술연구팀의 책임연구원

 

 

아래글은 휘버스 원년멤버 정원찬 위성박사님께서 추억을 더듬어

 

2004년 상세하게 올려주신 휘버스의 탄생과 역사입니다.

 

 

휘버스 이야기

 

글: 정원찬

 

이 이야기는 Fevers를 아끼고 사랑해주신 여러분에게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있는 사실을 최대한 등장인물 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단,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으므로, 본 게시판 외에는 다른 곳으로 복사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의 관점에서 쓴 이야기이므로 같은 내용을 다르게 생각하는 분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저는 그냥 제가 아는 것을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할 것이고, 혹시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은 나중에 다른 분이 보충해 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1. 음악을 좋아하던 고등학생들

 

1974년 3월 고교 평준화가 이루어진 첫 해에 우리는 컴퓨터에 의한 배정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배명고등학교!

왕십리의 도로변에 있는 학교로서 공동학군(서울시 중앙부에 위치한 학교들)에 편성되어 있었으며, 은평구 (당시는 서대문구)가 집이었던 저로서는 2번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 30분 걸려서 가야하는 먼 학교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모두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보람된 학창생활을 보내고자 노력하듯이, 저는 음악에 푸욱 빠져 있을 때라서 음악을 잘 하는 친구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다른 친구와 듀엣 만들어 이런저런 문학의 밤, 방송제 같은 곳에 찬조출연도 했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음악 이야기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 1학년 같은 반에 뛰어난 기타 실력을 가진 친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문장곤은 일찍부터 기타을 배워 뛰어난 연주실력을 갖고, 모르는 팝송이 거의 없었으며, 중학교때부터 청소년 밴드에서 기타을 치던 친구였지요. 자연스레 어울리며 학교에서 멀지 않았던 그 친구 집에 자주가서 음악도 듣고, 함께 기타도 치고 (못친다고 그 친구에게 쿠사리도 먹고)하였습니다. 그 집에서 상당히 폭넓은 분야의 음악을 함께 들으며 공부도 많이 하였지요.

그러다가 1학년 가을 우리 학교에서 문학의 밤과 방송제를 개최하면서 다른 반의 한 친구가 솔로로 나와 노래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4월과 5월이 불렀던 ‘바다의 여인’을 부르는 것을 들었는데, 고운 목소리와 뛰어난 음악 소화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 친구가 이명훈이었습니다.

2학년이 되고 1학년 때 반이 달랐던 친구들도 조금씩 알게 되면서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는 서로 통해서 알게 되었고, 누가 기타를 잘 치더라, 누가 노래를 잘 하더라 하는 것이 동급생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죠.

 

그러다가 10월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며 우리는 재미있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룹사운드를 조직하여 매일 밤 친구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기 기타와 베이스 기타, 앰프, 그리고 드럼 (full set는 아니고 심벌 2개와 스네어 드럼 1개)을 준비한 우리는 매일밤 공연을 했고, 당시 기타를 잘 치던 다른 친구 한명이 기타를, 문장곤 군이 베이스를 맡았고, 드럼을 배우고 있던 친구 1명이 드럼을 맡았으며, 노래는 주로 이명훈 군이 하되 중간중간 저도 끼어들어 함께 불렀지요.

저희들은 항상 가장 큰 방을 잡아 저녁을 먹고나면 공연을 시작하여 밤 늦게 까지 연주했고, 많은 학생들 뿐 아니라 인솔대장이셨던 교감선생님께서도 저희와 함께 춤추며 노셨습니다. 이렇게 노는 것이 다른 탈선의 길을 막는 거라면서 저희들 격려도 해주셨구요. 모두에게 아주 인상깊은 수학여행이 되었지요.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우리는 좀더 활동범위를 넓혔습니다. 음악연습실을 빌려 함께 연습도 하면서 저는 전자올갠 주자가 되었지요. 다른 고등학생들의 무대에 찬조출연도 하다가 겨울방학이 되자 야심찬 기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등포에 약 100-150명쯤 장소를 빌려 공연을 하기로 했지요. 친구들 통하여 티켓을 팔아 공연장소와 악기 대여비를 충당하였는데, 2회 공연이 모두 꽉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별로 남은 돈은 없었지만 손해는 안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희가 연주하던 곡들을 살펴보면,

 

    국내곡 : 너, 화, 나는 못난이, 편지 등

    외국곡 : Who’ll Stop The Rain, Let It Be, Have You Ever Seen The Rain, The Letter

    연주곡 : Django 등

 

어렵거나 연주 수준이 아주 높은 곡들은 아니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곡이었기에 관중들의 반응을 좋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렇게 재미있는 겨울방학을 음악과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보내고나서 3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대학교에 들어가 꼭 그룹을 다시 하자는 굳은 약속을 하고, 그러기 위하여 1년간 공부 열심히 하자는 각오를 다지고 그룹을 잠정 해체 하였습니다.

 

2. Fevers의 탄생과 무명 시절

 

1977년 1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는 1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그룹사운드 활동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함께 하던 친구 중 기타를 맡았던 친구와 드럼을 치던 친구는 각자 개인 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명훈, 문장곤, 정원찬 3명이 주축이 되어 팀을 만들기로 했는데, 중학교 시절에 문장곤 군과 함께 음악을 했었던 기타리스트가 합류하였고, 그 기타리스트의 1년 후배인 송용섭 군이 드럼을 맡게 되었습니다. 1978년 2월 다섯 명은 문장곤 군의 집에 모여 그룹을 결성하고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습했던 곡들은 국내 곡으로 ‘님과 바다’ 등이 있었고, 외국 곡으로는 That’s Rock’n Roll 등 여러 곡 (생각이 다 나질 않네요), 그리고 연주 곡으로 중간의 드럼 연주가 아주 신나는 Wipe Out 등이 있었습니다.

그룹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던 중 That’s Rock’n Roll 노래 가사 중  I’ve got a Fever 라는 구절이 눈에 띄더군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얻었고 그래서 음악을 시작했다는 노래인데, 저희들과 비슷한 것 같아서 그룹 이름을 Fevers로 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곡들을 연습하다보니, 우리 노래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8년 3월 초의 어느 날 밤 자려고 누웠다가 떠오르는 멜로디가 있어 벌떡 일어나,‘그대로 그렇게’라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는데, 노래를 완성하는데는 20-30 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노래라고 봐야죠.

1978년 3월 연세대학교 신입생환영회가 있었고 (무악골 잔치 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 행사를 맡아서 기획하던 연세대학교 레크리에이션 연구회에서 저희를 초청하여 Fevers의 첫 무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때 저희를 불러주신 분이 최용석 이라고 하는 레크리에이션 연구회장이었는데 신과대 학생이었습니다.

신입생환영회 날 그대로 그렇게를 포함하여 모두 9곡을 연주하였고, 첫 무대치고는 괜찮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춤추고 노는 시간이었지요. 저희는 첫 연주에서 꽤 자신을 얻었고, 앞으로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78년 4월 기타를 맡았던 친구가 개인 사정으로 팀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 후속주자를 구하던 중 드럼을 맡았던 송용섭 군이 김흥수라는 기타리스트를 데려와서 우리와 합류시켰습니다. 김흥수 군은 상당히 빠른 손놀림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타 애드립에서 유연한 연주 실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1978년 5월에 저희의 2번째 무대가 있었습니다. 이대 의대 수양회였는데, 그곳에서 연주를 해 주는 것이었지요. 역시 연세대학교 레크리에이션 연구회에서 진행을 맡으면서 저희 그룹을 함께 초청하였습니다.

새로 합류한 김흥수 군과 함께 저희 5명은 3월에 부른 곡들에다 몇 곡을 추가하여 연주하였고, 수양회에 참석한 많은 여학생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습니다. 부천 근처의 수양관이었는데, 밤늦게 돌아오느라고 애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가끔씩 연주를 하면서, 저희들은 맹렬히 연습을 하였는데, 주로 문장곤 군의 집에서 했었습니다. 아무래도 주택가의 단독주택에서 연습을 하다보니 사운드를 크게 하지 못하고 불륨을 줄인 상태에서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죠. 그리고 함께 사운드를 맞추기 전에 충분히 음악을 듣고 각자의 파트를 앰프 없는 상태에서 개인 연습한 후에야 사운드를 맞추는 연습을 했습니다. 답답하긴 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죠.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동네에서는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연습을 하는데 경찰 한 분이 오시더군요. 동네에서 신고가 들어왔다고…

저희는 파출소에 가서 약 3-4 시간 주의를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 경찰관님도 저희들 마음을 이해해 주었는데, 신고가 들어온 이상 바로 보내주기는 어렵다며 몇 시간 앉아 있으라고 한 것이죠.

그 이후로 연습장소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어린이대공원 근처의 한 술집에 양해를 구하고, 영업을 하지 않는 낮 시간에만 연습을 하기로 했습니다. 가끔씩 저녁 시간에 단체 손님이 원할 때에는 연주도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좀더 효과적인 연습이 될 수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좋은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가 대천에서 여름 내내 해변가에 텐트 치고 고고장 (당시에 그렇게 불렀죠)을 운영한다면서 저희들에게 연주를 부탁한 겁니다. 돈은 안 주기로 했던 것 같은데, 저희는 돈 보다는 단지 여름내내 숙식을 제공받으며 맘껏 연습할 수 있다는게 매력이었습니다.

그걸 대비해서 연습을 더욱 열심히 하길 2주쯤, 그 대천 계획이 취소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바닷가의 꿈이 날아가 버려 실망하고 있었는데…

그때 바로 TBC 해변가요제가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본선에 진출하면 공짜로 바닷가에 갈 수 있다는 게 매력이었지요. 해변가요제는 대학가요제와 달리 창작곡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당시 저희의 유일한 창작곡인 그대로 그렇게를 가지고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3. 해변가요제 준비 및 예선 참가

 

하나의 곡 만으로, 그것도 처음부터 중간까지만 연주한 것으로 자신들의 음악성을 평가받고, 그 평가에 의해서 순위가 매겨지고, 일정 순위를 벗어나면 탈락을 하게 되는 가요제라는 형식은 참가자들에게 참 힘든 관문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한번의 시험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입시와 다를 바 없지요. 그래서 저희들은 해변가요제 참가를 결정한 이후, 6월 중순 경부터 ‘그대로 그렇게’ 한 곡 만으로 맹렬한 연습을 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생들도 어린이대공원 근처의 연습장소를 찾아와 응원해주었구요. 마침 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어서 저희는 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룹사운드의 연습이란게 한 두 명이 수업 간다고 빠지면 전체 사운드가 나오지 않아 맥빠진 연습이 되거든요. 더구나 저희들은 학교가 모두 달랐기 때문에…

일단 곡의 형식은 모두 정해져 있었던 상태에서, 이 노래의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연주기법을 찾느라 연구도 많이 하고, 시행착오도 여러 번 했습니다. 정해진 코드 안에서 각 악기의 연주를 하나로 모아 그 노래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찾으려고 한 것이지요. 악기들의 연주 방법을 찾을 때는 모두가 함께 들어주면서 의견을 교환했었는데, 음악의 사운드를 듣고 적절한 방향을 찾는 것은 베이스를 맡았던 문장곤 군이 탁월했습니다. 베이스를 연주하면서 기타와 드럼과 함께 곡 전체의 리듬과 느낌을 아주 잘 살렸지요. 문장곤 군의 활약은 앞으로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많이 나올 겁니다.

그와 동시에 코러스 부분도 강화를 했습니다. ‘떨어지는~’ 부분부터 3도 높인 화음을 넣었고, ‘그대로 그렇게 ~’ 부분에 모두 함께 노래를 하여 강조를 하였으며, ‘울어버릴 걸’의 ‘걸 ~’ 부분의 엇갈리는 화음도 집어넣어 노래의 맛을 여러 군데에서 살려주도록 하였지요.

잠시 옆길로 샙니다만, 작곡가가 노래를 만들 때 받았던 느낌을 그대로 살려 연주하고 노래를 해야 그 곡의 느낌이 살아나고, 듣는 사람들에게 더욱 강렬하고 정확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저희 모두가 갖고 있던 생각이었고, ‘그대로 그렇게’ 이후로도 많은 곡들을 그런 방식으로 완성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야기가 되겠지만, Fevers가 부른 많은 곡들은 Fevers 멤버들이 함께 완성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맹렬한 연습을 하다가 7월 초순 경 1차 예선에 참가하였습니다.

당시 서소문에 있던 TBC 방송국에 가서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솔로, 중창, 그룹사운드 모두 합하여 429 팀이 참가하였더군요. 공짜피서를 갈 수 있는 팀은 15팀 뿐인데…

그래도 당시 저희들은 자신감에 차 있는 당돌한 장난꾸러기들이었기에, 별로 당황하거나 긴장하지는 않았던 걸로 생각됩니다. 단지 떨어지더라도 429 팀이 참가했다고 남들에게 얘기하면 좀 덜 창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1차 예선은 TBC 방송국의 라디오 공개홀에서 비공개로 열렸는데, 공개홀이 생각보다 작더군요. 그 공개홀을 반으로 나누어 중간에 커튼을 치고, 약 10팀 정도는 한 쪽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반쪽에 심사받는 팀이 들어가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순번이 10번 정도 남으면 들어가서 다른 사람 연주하는 것을 커튼 너머로 들을 수 있는 것이지요. 긴장했는지 중간에 틀리는 사람, 목소리가 어색하게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법 잘 부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희 차례가 되어 커튼 너머의 반대쪽으로 가니까, 키보드가 있는데…

! 2단 키보드였습니다. 지금까지 1단짜리 키보드 밖에 해 보지 못했는데, 심사하는 자리에서 2단짜리를 처음 만져보게 되니 난감하더군요. 그래도 한손은 윗 건반, 다른 손은 아래 건반에 놓고 몇 번 두드려보니 그런대로 할 만 했습니다.

저희는 느리게 나오는 전주부터 시작하여 중간의 ‘그대로 그렇게 ~ 울어버릴 걸’까지 하고 심사가 끝났습니다. 열심히 연주하고 있는데 중간에 ‘땡’하는 소리를 들으면 꼭 탈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하지만 남들도 모두 그렇게 했으니까, 1차예선은 반만 듣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후 중앙일보에 1차 예선 통과자 명단 45팀이 나왔고, 저희 이름이 거기 들어 있더군요. 그리고 2차 예선 일시도 나와 있었구요. 1차 예선 이후에도 계속 열심히 연습을 하던 중이라서 더욱 연습에 박차를 가해 참 열심히 했습니다.

2차 예선은 해변가요제 열리기 10일 전 쯤에 있었는데, 마찬가지로 TBC 라디오 공개홀에서 열렸습니다. 단, 이번에는 공개방송으로 진행을 하더군요. 저녁 8시부터 시작하는 라디오 프로였는데, ‘노래하는 곳에’라는 이름의 프로가 맞을겁니다.(약간 가물가물) 권태수 씨가 진행하는 프로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혹시 정확히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주세요. 공개방송이니까 노래를 끝까지 연주하게 해 줄거다라는 생각에 후반부의 높이 부르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연습했고, Ending 부분도 많이 연습했습니다.

2차 예선을 가보니 공개방송이어서 청중들이 와 있더라구요. 약 40-50명 정도로서 모두 중,고생들이었는데, 그때 PD가 앞에서 박수치는 것을 지휘하는 걸 처음 봤습니다. 저도 그 프로를 많이 듣는 사람이었는데, 라디오에서 들을 때는 적어도 2,3백명은 되는 줄 알았지요. 방송이란 것이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2차 예선을 무사히 마치고 최종 본선 진출자 15명의 명단이 역시 신문에 났고, 저희는 공짜 피서를 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2차 예선은 공개방송이었기 때문에 방송 출연료도 주었습니다. 5천원.

5명이 5천원을 가지고 무얼할까 하다가 저희 팀의 유니폼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하얀 T셔츠 5벌 : 3500원 (동대문 시장에서 구입. 한벌에 700원)

(당시 싼 티셔츠 한벌 값이 2천원 했으니까 7백원으로 샀다면 대단히 싸게 산 거지요)

빨간색 스프레이 : 1000원

두꺼운 도화지 1장과 가위 : 500원

이렇게 5천원으로 물건을 사고는, 도화지에 Fevers라고 멋지게 써서 오려내고, 그 도화지를 티셔츠에 대고 스프레이를 뿌렸습니다.

해변가요제 디스크 좌측 하단에 나와 있고, 본 까페의 사진모음에도 나와 있는 저희 사진에서 입고 있는 티셔츠가 바로 그겁니다. 5벌의 티셔츠 중 스프레이를 뿌릴 때 도화지가 흔들려 번진 것이 2개 있었는데, 그것은 무대 뒤쪽에 있게 될 드럼과 키보드 주자가 입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직도 기념으로 가지고 있는 그 티셔츠는 붉은 색이 번져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겠네요.^_^)

해변가요제 전날 본선진출자들은 방송국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여 다음날의 일정 등에 대해 전달 사항을 들었고, 오렌지 주스도 한잔씩 제공받아 마셨습니다. 진출자들끼리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날이지요. 당시에는 무명이었지만 나중에 유명하게 된 사람들 모두 거기에 있었습니다. 출전한 팀과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아실 테니까 생략하지요.

그런데, 그날 저희들을 모두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회의 시작시간보다 좀더 일찍 방송국에 가서 프로 녹음하는 것도 보고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방송국에는 정식직원이 아니면서 심부름 등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테이프를 들고 복도를 지나가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더군요. 어디서 많이 듣던 멜로디라 자세히 들어보니 ‘그대로 그렇게’였습니다.

저희들도 모두 깜짝 놀랐지요. 방송국에서 1.5번 밖에 연주하지 않은 노래인데, 그런 노래를 따라 부른다는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노래인가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기분은 참 좋더군요.

그리고 다음날. 1978년 7월 22일 토요일.

우리는 아침 8시에 TBC 방송국 앞에 모여 대절된 2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연포로 향했습니다. 대망의 공짜 피서를 가게 된 것입니다.

 

4. 해변가요제 (1978.7.22)

 

공짜피서.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피서라고 하면 단체 캠프가 아닌 이상, 배낭에 먹을 것 싸 짊어지고 버너, 코펠 준비하여 텐트를 가지고 가는 것이었지요. 줄 서서 시외버스를 기다리고 여러 번 바꿔 타면서 때로는 짐 들고 걷기도 하면서 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짜 피서는 가볍게 옷가지만 챙겨서 관광버스 타고 바닷가까지 가는 것이니 귀빈대우를 받는 것처럼 편한 여행이었지요.

8시 40분까지 서소문에 있는 TBC 동양방송 사옥 앞에 모인 본선 진출 15팀의 참가인원 42명과 방송국 직원들을 태운 관광버스 2대는 천안, 예산, 서산, 태안을 지나 연포 바닷가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얀 모래와 푸른 바다, 그리고 백사장 한쪽 구석의 야외 무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방 배정

방송국 측은 커다란 여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 참가자들과 방송국 직원들이 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솔로나 중창팀은 2,3 팀이 한 방을 쓰고, 그룹사운드는 한 팀이 한 방을 쓰게 해 주었기 때문에, 저희 팀은 모두 한 방에 들었습니다. 기타 김흥수, 베이스 문장곤, 키보드 정원찬, 드럼 송용섭, 싱어 이명훈 외에 고등학교 동창 1명이 함께 쫓아와 저희들과 함께 1박2일을 보냈습니다. 방송국에는 그 친구를 저희 매니저라고 했지요.ㅋㅋㅋ

바로 점심시간이 되어 방송국 측은 팀마다 인원수대로 식권을 나누어 주었고, 여관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공짜 피서에 편한 방에서 자고 밥 할 필요 없이 공짜 밥 먹으니 참 편하더군요.

점심을 먹고 저희는 바로 수영복 갈아 입고 바다로 갔습니다. 이명훈과 친구 1명은 수영을 아주 잘 했고, 나머지 인원들도 그럭저럭 잘 했는데, 저는 맥주병이었습니다. (에고 챙피해라) 전에 수영 잘 한다고 뻥을 크게 친 일이 있었는데, 그날 완전히 발각이 된 거지요. 친구들은 계속 놀려대며 깊은 곳으로 가고 저는 낑낑거리고… 힘든 오후였습니다.

물에서 놀다 모래밭에 앉았다 하며 놀다 보니 어느새 저녁 무렵이 되더군요. 배도 고프고 하여 여관으로 갔더니, 아니 이런…

모든 방에서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오후에 저희들은 실컷 놀았는데 (공짜 피서니까) 모두들 마무리 연습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습니다. 남들 공부하는데 실컷 놀고 시험시간 가까워져서 정신이 번쩍 드는 학생처럼 저희도 부랴부랴 연습을 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해는 지고 야외무대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제1회 TBC 해변가요제는 막을 올렸습니다. 솔로 5명, 중창 5팀, 그룹사운드 5팀의 참가자들은 각자 최선을 다해 노래를 했습니다.

솔로에서 ‘요즈음’을 부른 조인숙 씨는 시원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정말로 사랑하니까’를 부른 조성재 씨는 맹인가수로서 기타 연주 솜씨와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매력이었습니다.

중창 부분은 한양대 징검다리 팀이 ‘여름’이란 흥겨운 노래를 선보였고, 듀엣 벗님들이 ‘그 바닷가’라는 노래로 멋진 화음을 들려 주었습니다. 후에 개그맨이 된 주병진 씨도 누나 주선숙 씨와 함께 듀엣으로 출전하여 ‘속삭여주세요’란 노래를 불렀지요.

그룹사운드는 참 치열했습니다.

홍익대 블랙테트라의 ‘구름과 나’는 노래의 완성도도 높고, 싱어인 구창모 형의 노래 소화력도 뛰어났습니다. 각 파트의 연주도 대단히 훌륭했구요. 배철수 형이 이끄는 항공대 런웨이는 독특한 리듬과 연주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불렀는데 소월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서, 한국적인 냄새가 가득 배인 노래였지요. 장남들이 부른 ‘바람과 구름’은 제가 참 좋아하는 곡입니다. 연주도 깔끔하고 곡도 좋고 싱어의 목소리도 매력있었어요. 그리고 중앙대의 블루드래곤즈의 ‘내 단하나의 소원’은 조용한 연주와 싱어 김성호 씨의 바이브레이션 가득 섞인 고운 소리가 일품이었습니다. 그렇게 둘러보면 저희가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들더군요. 모두 잘 하는 팀들이고 곡들도 좋고…

모두의 발표가 끝나고 TBC 김인배 악단장님을 심사위원장으로 한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하시는 동안에 초대가수들이 나와 노래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윤복희 선배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신 하수영 선배님 등이 나오셔서 노래해 주셨는데, 초대가수의 노래가 다 끝나도 심사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초대가수 들이 다시 한번 무대에 올라 한 곡 씩 더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그 동안 저희들도 나름대로 등수를 생각해 보았지요. 등외로 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최우수상이나 우수상은 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인기상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슴 떨리는 최종결과 발표에서 장려상 5팀을 발표하는데 저희 팀이 없더군요. 그리고 인기상 발표에서 처음 두 팀을 발표하는데 저희 팀이 없어서 혹시나 저는 속으로 우수상이 아닐까 아주 잠깐 동안 생각했습니다. 인기상 3번째 발표팀이 저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수상은 블랙테트라, 최우수상은 징검다리에게 돌아갔지요. 상금은 최우수상 30만원 우수상 20만원 인기상 10만원 장려상 5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제 1회 TBC 해변가요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방청객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녹음이 있었습니다. ‘횃불 축제’라는 이름의 특집방송이었는데, 해변가요제 참가팀들이 가요제 끝나고 1주일 후에 다시 연포를 찾았다고 설정하여 방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요제는 조금 전에 끝났는데, 1주일 전에 있었던 것으로 얘기해야 하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대화가 많았습니다.

진행자인 황인용 선생님이 징검다리에게 가요제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떠냐고 묻자, 왕영은 양은 ‘바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지요. 다시 다른 징검다리 멤버에게 상금은 어떻게 썼냐고 묻자 ‘아직 한 푼도 쓰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죠. 돈 쓸 틈이 없었거든요. 그 얘기를 들은 출연자들 모두 깔깔거리며 웃고 진행자도 웃었는데, 1주일 후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웃는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가요제 끝나자마자 녹음 방송을 했을거라고 짐작을 못했을테니까요.

그 방송을 진행하다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모두 둥글게 앉아 있었고, 저는 우리 그룹의 가장 오른쪽에 앉아 있었지요. 저의 오른쪽에는 징검다리 팀인데 그 팀의 가장 왼쪽, 즉 저의 바로 옆자리는 정금화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송 중에 갑자기 저를 툭 치더니 서울의 교동국민학교 나오지 않았느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 이름을 대는데, 이름은 알겠는데 얼굴이 국민학교 때 얼굴과 많이 다르더라구요.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 아마 기분이 나빴을겁니다. 저희 국민학교 졸업할 무렵에 학예회가 있었는데 저는 노래를 하고 정금화 양은 피아노 반주를 해 주었거든요. 그 뒤로 고등학교 때 동창회에서도 한번 보았는데 가요제 당시에는 키도 훌쩍 크고 얼굴도 변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더라구요. (에구 미안해라)

지금은 재즈 가수로서 활동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얘기 나옵니다만 1979년 봄에 방송국에서 보고는 한번도 못 봤습니다. 보고 싶네요.

밤을 잊은 그대에게 방송 중에 김홍철 선배님의 요들 송 지도가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쉽고 재미있더라구요. 가성으로 노래하다 생목소리로 바꾸는 부분이 요들인데, 함께 하다 보니 이상한 목소리도 많이 들리고… 그리고 김인배 악단장님께서 트럼펫 연주를 해주신 것도 있는데 (밤하늘의 트럼펫), 실제 파도소리가 들리는 바닷가의 한 밤중에 듣는 트럼펫 소리는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지이이잉 하는 것 같은 울림이 느껴지더군요.

방송이 끝나고는 뒷풀이가 밤새 이어졌습니다.

참가팀들, 방송국 직원들 모두 백사장에 둥글게 앉아 가운데 불을 피워 놓고 한쪽에는 맥주를 박스로 사람 키보다 높게 쌓아놓고 밤새 놀았지요. 모두 음악하는 사람들이니까 함께 노래부르는 것도 예술이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다가 한 팀씩 돌아가며 장기자랑을 하기로 했어요. 단 참가곡 부르는 것은 안되는 것으로 하고. 모든 팀들이 부랴부랴 하나씩 준비하여 장기자랑을 했는데, 저희 팀은 이명훈, 문장곤 두 사람의 연극이었습니다. 이수일과 심순애 중의 한 장면인데, 이명훈 군이 이수일을 맡아 긴 대사를 하는 것이었고, 대사없는 심순애 역을 문장곤 군이 맡아 잘 소화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재미있어 하더군요.

그 장기자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팀이 당시 듀엣으로 참가한 벗님들이었을 겁니다. Simon and Garfunkel 노래를 부르는데 오리지날 곡보다 더 잘하는 것 같더군요. 절묘한 화음과 잘 어울리는 음색. 앵콜을 받아 여러 곡 불렀던 걸로 기억납니다.

장기자랑 끝나고는 모두 일어나 불 주위를 돌면서 춤도 추었는데요, 레크리에이션 연구회에서 포크댄스부장을 하던 제가 몇 개 했지요. 황인용 선생님은 그 후로 저를 보면 ‘어이 춤선생’하고 부르시더군요.

날이 훤하게 밝아오면서 파티가 끝났습니다. 모두 밤을 새면서 놀았던 거죠. 다들 기운이 빠져 모래밭에 앉아 밝아오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병진 씨가 일어나더니, ‘저 앞에 보이는 섬까지 다녀오겠다’라고 하며 바다로 뛰어 들었습니다. 수영 도사인 주병진 씨는 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영을 하다가 (섬까지 가지는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모두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나오라고 하데요. 그래서 바닷가에 나가 팀별로도 사진 찍고 참가자 모두 단체 사진도 찍었는데, 그 사진들이 해변가요제 판에 나와 있는 사진들입니다. 모두들 부스스한 것이 별로 예쁘지 않은 이유는 자다가 나와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지요. 저희 팀은 4명 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기타를 맡았던 김흥수 군은 계속 잠을 자야겠다고 나오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Fevers는 4명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김흥수 군은 아마 두고 두고 후회를 했겠지요.

점심을 먹고 서울까지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서소문의 TBC 앞에서 헤어졌는데, 1박 2일의 공짜피서를 아주 재미있게 마친 것이지요.

출연료로 받은 10만원으로는 (세금 떼고 8만원 가까이 되었음) 무엇을 할까 하다가, 한 팀에 하나씩 밖에 받지 않은 트로피를 나누어 갖자고 의견이 모아져서, 4개의 트로피를 같은 모양으로 더 만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아직도 제 방에 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나 집을 떠나 공부할 때면, 부모님께서 많이 어루만져 주셨다고 하데요. 제가 음악활동 하는 걸 반대하셨던 분들인데, 그래도 트로피를 자주 들여다 보시며 아들 생각하셨던가 봅니다. 이제는 많이 낡았고 트로피 몸통과 그 위의 갈매기 모양이 분리되어 보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옛 추억을 되살려주며 항상 방 한 구석에 있지요.

 

5. 해변가요제 음반

 

해변가요제를 마치고 약 10일 후 해변가요제 음반 제작을 위한 녹음이 있었습니다. 가요제 당시에 녹음된 것은 바닷가에서 한 것이고 다른 소리가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음반으로 바로 내기가 부적합하지요. 그래서 녹음실을 빌려 다시 녹음을 한 것입니다.

해변가요제가 TV로 방영되지 않았고, 라디오로만 방송되었기 때문에, 음반의 중요성이 컸었고, 음반에서 녹음을 잘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가요제 끝나고 다시 어린이대공원 옆의 연습실에 모여 연습을 강화했지요. 전주부분도 약간 강렬하게 바꾸었고, 화음 부분의 연습도 맹렬하게 했습니다. 리듬도 다시 한번 점검하고 산뜻하게 만들기도 했구요.

8월 초 쯤으로 기억됩니다. 저녁을 일찍 먹고 약속시간에 마장동에 있는 스튜디오에 도착해보니, 블루드래곤즈가 연주를 마쳤고, 장남들이 연주 녹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기실에는 해변가요제 참석한 그룹사운드가 모두 모여 있었구요. 녹음 방식은 연주를 먼저 따로 하고, 그 연주를 들으며 노래를 부르고 녹음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남들에 이어 런웨이가 연주 녹음을 마치고 저희가 녹음을 하게 되었지요. 아무래도 음반에 실릴 것이기 때문에 여러 번에 걸쳐 연습을 하였습니다. 연습하는 중에 녹음실 기사분께서는 각 악기의 볼륨 조정도 하고, 그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가장 잘 된 것을 골라 음반에 싣게 됩니다.

연주를 하는 방과 녹음을 하는 방은 분리가 되어 있고, 방음장치가 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큰 창이 하나 있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소리는 직접 전달이 되지 않으니까 녹음 기사님이 마이크를 통하여 말을 하면 우리는 머리에 덮어쓴 헤드폰을 통하여 들을 수 있지요. 저희가 의견을 말할 때에도 마이크를 통해서 하는 것이구요.

연주하는 방 한쪽에는 신호등 처럼 생긴 램프가 4개 있습니다. 제일 왼쪽에 흰색으로 ‘Test’라고 되어 있고, 그 옆에 노란색으로 ‘Rec’, 그 옆에는 빨간색 ‘NG’, 제일 오른쪽이 녹색으로 ‘OK’ 입니다. 연습을 하고 있을 때에는 Test 라는 곳에 불이 들어와 있다가 녹음을 시작하면 ‘Rec’ 램프에 불이 들어오지요. 그러다가 녹음 중 틀린다든지 소리가 이상한 경우에 ‘NG’에 불이 들어오며 부저가 ‘띠~’하고 울립니다. 녹음이 끝까지 잘 되면 ‘OK’라는 곳에 불이 들어오지요.

연주 녹음 하는데만 한 팀 당 한 시간씩 걸렸던 걸로 기억됩니다. 참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었지요. 어느 한 군데라도 틀리는 곳이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하니까 실수를 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저희 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녹음기사님도 힘들고 다른 팀들도 더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니까 참 미안하지요. 서로 격려를 하며 한 시간 정도 녹음을 하여 OK 사인을 받고 환호성을 올리던 기억이 납니다.

잠시 옆으로 샙니다만, 저희는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는 개구장이들이었습니다. 해변가요제에서도 황인용 진행자께서 ‘개구장이들로 이루어진 이색 그룹’이라고 저희를 소개하셨지요. 그런데, 방송이나 녹음할때는 긴장을 하게 마련이어서 경직되게 되는데, 저희처럼 농담과 장난을 많이 하면 별로 떨리지도 않고 긴장도 하지 않게 됩니다.

저희들이 잘 하던 장난하나를 말씀드리면

목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 있죠? 인도의 춤 처럼. 저희 팀에서 3명이 그걸 할줄 압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 방송시간을 기다릴 때 계단에 한 줄로 나란히 앉아서 (1열종대)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그 사람의 발걸음에 맞추어 고개를 좌우로 왔다갔다 하는 거죠. 그 사람이 멈춰서면 고개도 멈추고…

지나가던 사람은 처음엔 깜짝 놀라다가 곧 깔깔거리게 됩니다. 그런 장난 많이 했어요.

다시 본론으로.

저희와 블랙테트라까지 연주 녹음을 하고서 노래 녹음에 들어갔습니다. 연주 녹음을 했던 순서대로 했죠. 블루드래곤즈와 장남들까지는 먼저 시작했기에 12시 전에 마치고 집에 갈 수 있었는데, 나머지 3팀은 12시를 넘기게 되어 거기서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거든요.

저희 차례가 되어 마이크 앞에 나란히 서서 부르는데, 헤드폰을 쓰고 연주를 들으며 노래를 하니 제 목소리가 잘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노래를 틀림없이 하고 있는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참 긴장되는 것이더군요. 음을 맞게 내고 있는지 음색이 비슷하게 어우러지는지 잘 느끼지 못한 채 녹음을 마쳤고, 나중에 들어보니 제가 화음 넣은 부분이 좀 불안하더군요. 그 뒤로 친구들은 저를 수영 못하는 사람, 음정이 불안한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재미있는 녹음 기법도 하나 보았습니다. 그룹사운드 중 한 팀의 녹음을 한 결과, 노래의 앞 부분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고, 다시 녹음을 하니 노래의 뒷부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녹음기사분께서는 두 테이프를 합성하는 작업을 하시더군요. 하나의 녹음테이프를 플레이어에 올려 놓고, 노래 중간의 한 부분을 정하여 손으로 이리저리 돌려 소리를 들어 보시더니 그 부분을 가위로 자르고, 또 하나의 녹음테이프로 똑 같은 작업을 하였습니다. 두 테이프 모두 정확히 같은 부분을 자른 것이지요. 그리고는 뒷부분이 이상한 테이프의 전반부와 앞부분이 이상한 테이프의 후반부를 연결하여 붙이더군요. 그렇게 만들어진 테이프를 돌려보니, 다른 테이프 두 개를 붙였다고는 전혀 느낄 수 없도록 말끔하게 연결이 되었습니다. 참 대단한 기술이지요? 완성된 해변가요제 음반에 있는 그룹사운드 노래 중 하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느 노래일까~~요? 답은 안 가르쳐드립니다.

녹음을 마치고는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녹음실 한쪽 구석에서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희는 주로 그룹 경험이 많은 배철수 형, 구창모 형, 김정선 형 등과 함께 음악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경험이 저희보다 몇 배 많으신 분들이었고, 여러 종류의 음악을 연주해 보신 분들이라서 저희가 앞으로 음악활동 하는데 필요한 조언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녹음 때의 저희들 연주가 가요제 때 보다 깔끔해졌다는 칭찬도 들었구요.

이렇게 만들어진 음반이 8월 말 경에 시중에 나왔습니다. 연포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들이 앞에 모자이크처럼 어우러진 자켓이었지요. 다방에서 처음 저희 노래가 나올 때는 갑자기 심장이 멎는 것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기분이 참으로 묘하고 이상하더군요. 다방에서 나오는 노래는 모두 남의 것이었었는데, 우리 것이 나오다니…

당시에는 거리에 레코드 가게가 많이 있었고, 그 레코드 가게 앞에는 스피커가 하나씩 나와 있어 가게에서 틀어주는 음악이 거리까지 들렸는데, 그런 곳에서도 해변가요제 곡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지요. 또한 당시 많이 있었던 음악 다방에서도 해변가요제 판을 많이 틀어 주었습니다. 한 가수가 부른 다른 앨범에 비해 다양한 팀의 노래가 골고루 들어 있는 해변가요제 앨범은 음악을 틀어주던 DJ 들이 화장실 가거나 손님과 얘기할 때 걸어놓고 자리 비우기 좋은 음반이었지요.

또한 가요제에 출전한 사람들이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출전자들의 학교 친구들이 다방마다 다니며 열심히 신청을 해서 홍보를 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마침 2학기 개학 때와 맞물려 학교 등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단 기간에 대학가에서 인기 음반으로 뜰 수 있었습니다. 해변가요제 음반이 알려지면서, Fevers라는 이름과 ‘그대로 그렇게’라는 노래도 서서히 알려지게 됩니다.

 

6. 내사랑 영아

 

1978년 2학기가 되면서 해변가요제 음반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 음반에 실린 사람들이 대단했고 곡들도 좋았지요. 나중에 유명해진 많은 사람들이 해변가요제 앨범에서부터 시작을 했던겁니다.

저희들 곡도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라디오 방송에도 나가게 되었는데, TBC의 간판 심야프로인 ‘밤을 잊은 그대에게’, 4시 쯤부터 방송되던 가요프로 (신완수 PD님 거였는데, 이름을 잊어버렸네요.죄송), ‘노래하는 곳에’ 등등의 프로에 자주 참가하며 방송을 어떻게 하는지 익혔습니다.

그 무렵 한 사람이 저희에게 접촉을 해 왔습니다.

이일권.

원로가수 한명숙 선배님의 아들이고, 작곡과 기타연주를 잘하는 한양대 작곡과 학생이었습니다. 마침 저희 팀의 기타리스트 김흥수 군이 잠시 쉬어야 할 일도 생겨서, 이일권 군을 기타리스트로 대체하였고, 저희의 레파토리를 늘리기 위해 이일권 군의 곡과 제 곡들을 연습하였습니다. 마침 그때 모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제작하자고 연락이 와서 저희는 바로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내사랑 영아’는 이 때 이일권 군이 가지고 온 곡인데, 고운 멜로디와 예쁜 가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곡이지요. 느린 곡조에 이명훈 군의 바이브레이션 섞인 목소리가 잘 어우러져서 참 감미로왔던 곡입니다.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 어어쁜 영아를~~~

 

이일권 군이 가지고 온 곡은 그 외에도 ‘0시 5분전’, ‘행복한 사랑’, ‘한마디만 해줄걸’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원찬 작곡의 곡들은 ‘동해의 아침’, ‘시골로 가자’, ‘사랑의 전설’, ‘다시 만난 날’ 등이 있었지요. 이중에서 ‘동해의 아침’은 Fevers 탄생의 계기가 되었던 고2 경주 수학여행때 토함산에 올라 아침해를 보려고 하다가, 구름이 너무 많이 끼어 보지 못하던 중 갑자기 구름이 걷히며 환해졌던 느낌을 수학여행 직후에 표현한 곡입니다.

‘사랑의 전설’이란 곡은 원래 ‘떨어진 조개껍질’이라고 제목을 붙였던 건데, 모두들 제목이 맘에 들지 않아 고민하던 중, 이명훈 군의 작은 누나가 가사를 읽고는 “이건 ‘사랑의 전설’이네”라고 말하는 바람에 제목이 ‘사랑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런 곡들을 가지고 어린이대공원 근처의 연습장에서 약 1달 정도 준비를 하였고, 녹음날짜 가까워져서는 그곳에서 먹고 자며 준비를 했습니다. 잠은 소파에서 자고, 식사는 근처 식다에서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을 1,2개 주문하여 5명이 나누어 먹었지요.

마침내 9월 말에 마장동 스튜디오로 녹음을 하러 갔습니다. 이미 한번 경험이 있기 때문에 긴장하거나 신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녹음하던 날은 한명숙 선배님께서 직접 오셔서 저희들을 격려해 주시고, 노하우도 가르쳐 주시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곡들을 하루에 녹음하는 것은 참 힘들더군요. 그리고 ‘그대로 그렇게’만 연습하다가, 갑자기 많은 곡들을 1달 동안 준비했는데, 연습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따라서 편곡도 충실하게 하지 못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연습을 많이 한 곡들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곡들은 녹음 중 틀리는 부분도 많이 나왔고, 그러다보니 자신있는 연주가 되지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연주 후 노래를 녹음하였는데, 코러스가 들어간 노래는 많지 않아서 대부분의 곡을 이명훈 군이 혼자 불렀습니다. 녹음이 끝나고, 앞으로는 곡들을 미리미리 준비하며 완벽하게 소화한 후 음반 녹음을 하자고 의견들을 모았습니다.

첫 독집 디스크라서 앨범 사진도 찍었습니다. 지금 까페의 자료실 사진 3번인데요, 남산에 가서 찍은 3장의 사진 중 하나입니다. 그때 사진 기사분께서는 저희 그룹을 ‘휴바스’라고 부르셔서 저희가 많이 웃었지요. 그 사진의 가운데 뒤편 검은 양복이 이일권 군이고, 왼쪽 뒤편에 문장곤 군, 오른쪽 끝이 드럼을 맡았던 송용섭 군입니다. 그리고 저는 빨간 티 입고 촌스럽게 앞쪽 왼편에 어색하게 앉아 있고, 이명훈 군이 젤 앞에 앉아 있지요.

막상 앨범이 나오고 저희는 실망을 했습니다. 저희 독집 앨범인줄 알았는데, 다른 가수들과 함께 나왔더군요. 곡들도 많이 실리지 않고… 팀 이름도 ‘휘버스’가 아닌 ‘이명훈과 휘버스’로 나왔는데, 그것도 저희가 속상해 한 부분이었습니다.

저희는 다섯 개의 악기 (기타,베이스,키보드,드럼,목소리)가 조합되어 하나의 사운드를 만드는 음악을 추구했지, 한 사람의 목소리를 위해서 반주해주는 그룹이 아니었거든요. 당시에는 유명한 가수가 자신의 밴드를 조직해서 ooo과 ooo 등으로 많이 썼는데, 그 유행을 따라 음반사에서 이름을 붙였지요. 이래저래 좀 속상한 음반 제작을 마치고,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얻고 하며, 좋은 경험이라 생각했습니다.

녹음을 마치고 이일권 군은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보다 영장이 일찍 나와 저희와 일찍 헤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부랴부랴 쉬어야 했던 김흥수 군을 다시 합류시켜 기타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이일권 -> 김흥수로 교체되는 틈을 이용하여 또 한 사람의 멤버가 교체되는데, 키보드를 맡은 정원찬이었습니다.

 

7. 78년 가을

 

잠시 개인적인 얘기가 되겠네요.

Fevers가 점점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여기저기 무대에도 많이 서게 되고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연습도 많이 해야 하고, 곡도 많이 준비를 하게 되어 각 멤버들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78년 봄학기 학점도 시원치 않았는데 2학기 되자마자 독집 디스크를 만드느라고 (6부 참조) 수업을 많이 빠졌습니다. 좀 신경을 써야 했지요.

거기에다가 2학년 2학기에는 서클에서 임원단을 맡기 때문에 연구부장으로서 바쁘게 일해야 했었고, 여기저기 대학 축제나 학과, 단과대 모임 등에 사회도 보아야 했습니다. 또, 저의 어머님 친구분의 막내아들이자 제 친구의 고3 동생의 공부를 아르바이트로 보아주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바빴지요.

이렇게 많은 일 하다가 일들이 겹쳐질 경우, 갑작스레 잡히는 방송에 빠지게 되거나 연습에 많이 빠지게 되면 아무래도 사운드를 함께 만드는데 지장이 있게 되어, 이일권 군이 김흥수 군으로 교체되는 10월에 저도 빠지기로 했습니다. 계속 음악을 하고 싶어 하던 문장곤 군이나 이명훈 군에 비해, 저는 실력도 모자라고 하여 그룹 활동을 잠시만 하다가 그만둘 생각이었는데, 때가 된 것 같았지요. 새로운 키보드 주자로는 송용섭 군의 친구인 오택관 군을 불러들였습니다. 오택관 군은 키보드도 저보다 잘 쳤고,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주어, 결과적으로는 제가 빠진 것이 팀에 보탬이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기타 김흥수, 베이스 문장곤, 키보드 오택관, 드럼 송용섭, 싱어 이명훈, 이렇게 다섯 명이 Fevers 멤버로 연주를 하게 되는데, 처음 Fevers를 창단했을 때는 58년 개띠 들이 주축이 되었으나, 이 때는 문장곤 군과 이명훈 군만이 58년 개띠일 뿐, 나머지는 모두 저희보다 어렸습니다. 그리고 9월 독집디스크를 만들때에는 이일권,정원찬 2명의 작곡자가 있어 (당시에는 문장곤 군과 이명훈 군이 작곡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잘 하지만) 문장곤 군, 이명훈 군과 함께 노래의 편곡 등을 함께 의논했지만, 10월의 팀은 연주 실력은 향상되었으나 곡의 맛을 살리는 데 참여하는 사람은 줄어들었지요. 그래서 사운드 만드는 일은 문장곤 군이 도맡아 다른 사람들 지도도 하면서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이 다섯 명의 사진은 까페 자료실 사진 중 16번에 있습니다. 뒷줄 왼편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송용섭, 이명훈, 오택관, 김흥수, 문장곤 입니다.

새로운 멤버로 바꾸고 나서 첫 무대는 서대문 4거리에 있었던 간호전문대 축제 공연이었습니다. 1부에는 제가 사회를 보고 2부에는 Fevers가 연주를 하는 것으로 기획이 되었지요.

장소를 둘러보고 세부 내용을 협의하기 위해 이명훈 군과 제가 축제 며칠 전 간호전문대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서대문 4거리에서 광화문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데, 점심에 먹었던 내용물들이 갑자기 저의 몸 속을 빠르게 통과한 후 조기 탈출을 하고자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정에 없던 이런 일을 당해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아무 빌딩이나 들어갔다가 화장실이 닫혀 있어서 도로 나오려면, 탈출하고자 하는 놈들이 배신감을 느껴 더 아우성을 치지요. 그래서 정확히 아는 장소가 있으면 그곳으로 가는 게 안전합니다. 다행히 저는 광화문 육교 근처의 국제빌딩이던가 하는 곳의 지하에 항상 열려있는 쾌적한 화장실이 있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거리는 약 200 미터 정도, 놈들의 탈출구를 봉쇄하면서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옆에서 같이 걷던 이명훈 군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좀 빨리 걷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명훈 군은 “그래? 그럼 빨리 가야지” 라고 말하고는 더욱 천천히 걷는 게 아닙니까?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더군요.

걷는 속도도 문제였지만, 놈들의 탈출 이후에 사용할 무기 확보도 문제였습니다. 요즘도 그런 곳이 많지만, 당시 웬만한 화장실은 무기를 구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도 가지고 다니지 않았구요. 따라서 중간에서 무기를 하나 장만해야 했었는데 마침 옆에 버스 토큰과 담배, 휴지 등을 파는 작은 가게가 있더군요.

이런 경우, 일정한 속도로 걸으면서 놈들을 몸 안에 잡아두는 데 신경을 쓸 때는, 갑자기 몸의 상태를 바꾸면 위험해집니다. 휴지를 사러 멈춰 서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였지요. 그래서 저는 걸어가면서 돈을 꺼내 이명훈 군에게 주고는, “나는 저기 보이는 빌딩까지 계속 걸어가고 있을 테니까, 너는 얼른 클리넥스 하나 사서 뛰어와 내게 전해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빌딩 앞에까지 왔는데, 벌써 뛰어 와야 했었던 이명훈 군은 아직 도착을 하지 않은게 아닙니까?

순간 온갖 불길한 예감이 다 들더군요. 휴지 가게에 클리넥스가 다 떨어졌다든지, 돈이 모자란다든지. 그런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고자 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유유자적 걸어오는 친구의 모습이었습니다.

으으으… 배신감, 분노, 허탈함…

그러나 그런 것을 느끼기에는 우선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너무 중대했었습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일정하게 걷다가 멈춰서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행동이었지요. 따라서 저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이명훈 군이 오고 있는 쪽으로 다시 걸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뱃속의 놈들은 왜 오던 길 돌아가냐고 아우성을 치고…

이명훈 군에게 다가가 휴지를 낚아챈 저는 분노를 꾹꾹 누르는 목소리로 말했죠.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임마 !”

저는 꽤 엄숙하고 무섭게 말하려고 했는데, 당시 제 상황이 상황이었던만큼 (배에 힘주고 말 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음) 아주 이상한 목소리가 나온 모양입니다. 저는 심각한데 이 친구는 깔깔 웃더군요. 친구의 어려운 상황을 재미로 생각하는 고약한 눔.

겨우 겨우 무사히 일처리를 하고 나왔는데, 우리의 착한 친구 이명훈은 저를 보자 계속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임마!” 라는 대사를 연습하더군요. 그 뒤로도 이 친구는 잠시 어디에 다녀올 때면 그 대사를 읇조리고 가곤 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명훈 군과 함께 길을 갈 일이 생기면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절대 도움을 받을 생각 마십시오. 괜히 곤란한 사정을 얘기했다가 낭패를 본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간호전문대 공연은 재미있게 잘 끝났습니다. Fevers는 ‘광견’이라는 연주곡도 새롭게 만들어 그때 연주를 했던 걸로 기억납니다. 기타를 앰프에 갖다 대어 ‘삑~’ 소리가 나게 하고 거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등, 좀 무시무시한 연주였는데, 문장곤 군이 만든 곡입니다.

기억나는 또 하나의 공연은 연대신과대 축제 공연이었습니다. 11월 중순 경으로 기억됩니다.

Fevers의 첫 무대를 만들어주었던 최용석 회장은 당시 회장직을 물려주고, 신장에 이상이 있어 세브란스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밤 사이에 환자복 차림으로 위에 외투만 걸친 채 몰래 탈출하여, 신과대 축제에도 참석하고 성장한 Fevers도 만났습니다. 참 반가와 하더군요.

10월과 11월에 ‘그대로 그렇게’는 점점 인기가 올라가 각 방송의 인기 순위에서 1,2위를 다투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Fevers를 아는 사람도 많았지요. 이 즈음에 연습장소도 말죽거리로 바꾸었는데, 아마 이곳을 와 보신 분들도 계실겁니다. 이명훈 군의 큰 누나 집이었지요. 말죽거리 시내버스 종점에서 30분 정도를 걸어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고, 멤버들은 그 집 2층에 악기를 두고, 2층의 한 방에서 합숙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위험 부담을 약간 감수하면서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저희만의 단독 콘서트를 열기로 한 것이지요.

 

8. 첫 콘서트

 

1978년 12월 9일(토) ~ 10일(일)

남산 드라마센터

저희들이 잡은 콘서트 날짜와 장소였습니다.

가요제 출신으로는 처음 여는 콘서트였고, 그 성공 여부가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었지요.

저희는 특정한 기획사와 함께 일하지 않고 그냥 저희들이 뛰면서 홍보도 하고, 포스터도 붙이고 하며 준비를 하였습니다. 당시 서울예전 재학생이었던 이명훈 군이 드라마 센터를 빌렸고, 멤버들이 모두 학교가 달라 각자 학교에서 포스터 붙이고 팜플렛을 나누어 주며 티켓을 팔았습니다. 차가운 초겨울에 모두 열심히 뛰어다녔죠.

한편으로 5명의 멤버들은 말죽거리에서 맹연습에 들어갔습니다. 약 한 달 동안 합숙 훈련을 했던 것으로 기억되며, 저는 일요일마다 찾아가서 함께 음악을 듣고 의논도 하고 했습니다. 멤버들은 매일 연습을 하지만, 저는 1주일에 한 번 찾아가니까, 갈 때마다 실력들이 발전한 것을 느낄 수 있었지요. 정말 열심히들 연습했더군요.

연습 중 재미있던 일화 하나.

기타를 치던 김흥수 군은 좀 엉뚱한 소리를 잘 해서 저희들을 놀라게 하곤 했습니다. 드럼의 송용섭 군은 거의 하루종일 말이 없다가, 뭘 물으면 한 마디 툭 던지는 스타일이었구요.

하루는 연주 중에 다른 악기들이 멈추고 혼자 기타 애드립을 넣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냥 밋밋하게 서서 연주를 하길래, 콘서트고 하니까 폼을 좀 잡아보라고 했지요. 알았다고 대답한 김흥수 군은 애드립 부분이 되자 야구선수 이승엽의 외다리 타법 처럼 한쪽 다리를 꼬며 들어올리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개그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멋있는 걸 기대하며 김흥수 군을 주시하고 있던 우리 모두는 깔깔거리고 웃었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의 김흥수 군은 기타 밑 부분 양쪽으로 둥글게 튀어나온 곳 사이의 들어간 곳을 가리키며,

“여기가 왜 이렇게 파진건데? 이거 다리 올리라고 이렇게 파진거야.” 라고 하여 모두를 다시한번 떼굴떼굴 구르게 만들었습니다.

지난 해변가요제 때 사진을 못찍었던 김흥수 군은 콘서트 준비하면서 사진 문제를 계속 거론하였습니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잘 찍어야 한다’, ‘사진기도 여러 대 준비하자’ 등등

하도 사진 얘기를 많이 하니까 조용히 듣고 있던 송용섭 군 점잖게 한마디

“사진은 사진관에 가서 찍어야지”

토요일에 3회 공연, 일요일에 2회 공연으로 기획하여 준비된 티켓이 모두 팔려나갔습니다. 드라마센터는 약 500명 정도가 입장할 정도의 크기였는데, 당시 다른 장소에 비해 작은 편이었지만, 오붓하게 음악을 즐기기에는 좋은 장소였습니다.

무대는 약간 입체로 만들어 중앙 앞 쪽에 싱어 이명훈 군이 서고, 그 왼편 뒤쪽에 약간 높인 무대에 키보드 오택관 군이 앉았으며, 맨 뒷줄에는 왼쪽에 베이스 문장곤, 오른쪽에 기타 김흥수, 가운데 드럼 송용섭 군이 있었습니다.

서울 예전 학생들이 저희 콘서트를 도와주었는데, 무대시설 만들기, 조명, 막 올리고 내리기, 중간의 찬조 출연 (김명덕 군 외) 등을 맡아서 해 주었습니다. 또한 해변가요제 출전했던 다른 그룹사운드들이 모두 찬조출연을 해 주었고, 사회는 해변가요제 출전했다가 개그맨으로 활약하던 주병진 군이 맡았습니다.

12월 9일 낮에 공연장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줄 서서 문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 뒤로 그런 풍경은 자주 보게 되었지만, 그 때는 그 사람들이 저희 공연을 보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린다는 사실이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혹시 거기 줄 서 있던 분 계신가요?

Fevers의 복장은 좀 귀엽고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갔는데, 폴라를 입고 그 위에다 멜빵달린 위아래 붙은 작업복을 입었습니다. 이명훈 군은 까만 남방에 하얀색 멜빵 작업복, 나머지는 하얀 폴라에 청색 멜빵 작업복이었습니다. 드럼치던 송용섭 군은 빨간 헌팅캡을 썼지요. 모두 귀여운 모습이었습니다.

공연 시작도 장난스럽게 시작했지요. 방청석에는 불이 켜져있고, 무대에 커튼은 내려와 있는 상황에서 한쪽 구석에서 주병진 군이 나와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연습을 하던 중에 앰프 진공관이 나가서, 지금 그걸 사러 갔습니다. 약 30분 지연되겠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들어가면 관중석에서 “우~” 하는 소리가 나게 마련이지요. 모두들 “우~” 하고 야유를 보낼 때 관중석 불이 꺼지고 커튼이 올라가면서 연주가 시작되는 거지요. 야유가 갑자기 환호로 바뀌는 것으로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저희가 불렀던 곡은 1부에 ‘그대로 그렇게’, ‘내사랑 영아’, ‘0시 5분전’, 그리고 몇 곡의 팝송이었고, 찬조로 해변가요제 그룹사운드들의 공연과 서울예전 학생들의 공연이 지나면 2부에 ‘동해의 아침’, ‘사랑의 전설’ 그리고 ‘You Really Got Me’, ‘Be Bop A Rulla’ 등을 포함한 팝송을 했습니다. ‘Be Bop A Rulla’는 이명훈 군이 참 맛깔스럽게 잘 불렀는데, 그걸 부르고는 모두 악기를 놓고 무대에서 내려갑니다. 사람들은 앵콜을 외치고 그러면 사회자가 다시 팀을 불러내서 ‘그대로 그렇게’를 앵콜곡으로 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그대로 그렇게’ 애닯은 마지막 부분에서 막이 내려오고 그 막이 내려오는 밑으로 이명훈 군이 ‘나는 오직 그대 그대 만을…’ 부분을 손을 앞으로 내밀고 부르는 부분이었습니다.

중간중간에 꽃다발 들고 올라오는 관객들도 많이 있었고, 제가 가르치던 제자의 친구는 꽃다발 대신 푸짐한 배추 한 포기를 가지고 나와 이명훈 군에게 주었던 일도 있습니다. 이명훈 군의 작은 조카는 당시 5살 정도 되었는데, 꽃다발을 들고 아장아장 나오다가 사회자가 장난스럽게 그 꽃다발 달라고 하자, 싫다고 고개를 흔들더니 계속 달라고 하자 사회자를 발로 차서 모두 웃음이 터진 일도 있었습니다. 저도 중간에 작곡자 소개라고 하여 잠시 나가 주병진 군과 얘기를 하고 들어오기도 했는데, 영 어색해서 다음부터는 이런거 하지 말자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관객들은 대부분 두툼한 노트를 들고 다니며 사인을 받았습니다. 저희들과 찬조출연한 팀들 모두 사인 받으려면 노트 한 권이 필요했겠지요. 해변가요제 앨범에 사인을 부탁한 사람도 있었고, 티셔츠 등에 사인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5회 공연을 목표로 했던 저희들은 일요일 저녁 드라마센터 창문이 부서지는 일이 생기고 기다리던 팬들의 아우성이 커지면서, 1회 연장 공연을 했습니다. 표를 구하지 못한 채 그냥 바깥에서 기다리던 분들을 위한 것이었지요. 이틀동안 파김치가 되어 대기실에 널부러져 있던 멤버들은 도저히 일어나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6회 째 막이 오르자 또다시 열정적으로 연주와 노래를 하더군요. 그걸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무대의 구조, 화려한 조명, 크지 않지만 기능성이 뛰어난 공연장, 편안한 객석을 꽉 채운 관객과 열정적인 연주

이런 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저희들은 성공적인 첫 콘서트를 마치게 되었고, 방송가에서도 저희의 인기를 인정해주게 되었습니다.

 

9. 78년 겨울의 음악 작업

 

드라마센터에서 가졌던 콘서트는 작은 놀라움으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저희들은 이 콘서트를 통해 실력도 늘었고, 팬들도 직접 만날 수 있었지요. ‘그대로 그렇게’는 당시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기 투표 1,2위를 다투었고, 콘서트를 통해 ‘내사랑 영아’, ‘동해의 아침’ 등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콘서트를 녹음해 두지 않은 것이 참 아쉬웠는데, 그때 구경오신 분들 중에는 카세트 녹음기를 들고 와서 공연 내용을 녹음하신 분도 있습니다. 끝나고 나서 테이프를 틀어놓은 채 걸어가는 여자분들 (당시에는 여학생들)을 보았거든요. 이 공연을 보고 가요제 출신 다른 그룹사운드들도 각자의 공연을 기획하게 됩니다.

한편, 저희는 또 한번 기타리스트를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콘서트까지 무사히 마친 김흥수 군이 또다시 개인사정으로 빠지고, 그 자리에는 박호준이라는 기타리스트가 들어왔습니다. 박호준 군은 59년 생으로 당시 대학 1년생이었는데, 기타 솜씨가 부드럽고 깔끔하면서도 뛰어나고,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훌륭한 음악인이었지요. 팀에 들어와 문장곤 군을 도와 사운드를 만들고 편곡을 하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습니다.

콘서트를 마친 우리는 새로운 앨범을 낼 필요를 느꼈습니다. 9월에 녹음한 음반은 다른 팀의 노래와 섞여 있었고, 연습부족으로 녹음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아서, 새롭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새롭게 곡을 모으고 준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곡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산’ 이라는 노래는 당시 저희가 가장 야심차게 준비하던 곡이었습니다.

그룹에서 나온 제가 10월 초쯤 어느 산에 가서 (유명한 산은 아님) 느낀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산의 고요함과 평화로움만을 맘껏 즐기다 왔는데, 갑자기 여기서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몰아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산에서는 갑작스레 일기가 변하곤 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산의 변화 많은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에서 돌아와 앞 부분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부분의 노래를 만들고 (바람소리만 들려오네 ~), 또 뒷 부분의 빠른 곡조의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불러보면 대답없는 ~). 그리고는 바로 멤버들에게 가서 제가 만들고자 하는 내용을 설명했지요. 느린 곡조로 시작하는 노래가 끝나면 산의 다양한 모습을 연주로 보여주고 끝에 빠른 곡조의 노래로 끝내자고. 참 어려운 얘기였습니다.

처음 계획은 나단조로 시작되는 느린 곡조의 노래 다음에 라장조로 병행조 조바꿈을 하여 감미로운 Waltz 연주를 넣으려고 했습니다. 산이 아름다움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한 것이죠. 그다음에 라단조로 같은으뜸조 조바꿈을 해서 산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요소를 포함하려니 연결부분도 어색하고 연주를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콘서트 준비 때문에 잠시 작업을 중단했지요.

콘서트를 마치고 박호준 군이 들어오면서 우리는 다시 ‘산’을 완성하는데 매달렸습니다. 새로 합류한 박호준 군은 스스로 기타가 들어가야 할 부분을 찾아내어 곡의 흐름에 맞는 연주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전체적으로 곡의 정리가 쉽게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Waltz 부분을 과감히 잘라버리고, 고요한 산에서 변화무쌍한 산으로 바로 연결하기로 하고, 나단조에서 바로 라단조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 연결 부분은 당시 유행하던 바와 같이 갑자기 드럼 연주 같은 것으로 일시에 빠른 곡조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같은 코드와 리듬을 모두 함께 연주하다가 한 악기 씩 빠른 리듬으로 살짝살짝 바꾸어 고요한 산이 변화무쌍한 산으로 바뀜을 듣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지요.

79년 1월 초쯤, 우리는 3개월의 노력 끝에 산이란 곡을 완성했습니다. 총 7분 정도 걸리는 긴 곡이었는데, 단순한 반복을 통하여 길이만 늘인 것이 아니고, 하나의 긴 흐름을 중간중간 연주를 바꾸어가며 다양하게 표현하였던, 꽤나 정성을 많이 들인 곡이지요. 모든 멤버들이 다 애썼지만 문장곤 군이 종합적으로 사운드를 이끌어 가며 연구도 가장 많이 하는 등 공헌을 가장 크게 했고, 박호준 군이 기타 연주 부분을 잘 완성하고 가성의 코러스 부분을 잘 소화하였으며, 모두가 최선의 연주를 하여 잘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곡에 대한 작업을 하면서 저희들은 힘들었지만 중요한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의 곡은 작곡자가 맨 처음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담고 있어야 하고, 연주 내용도 곡의 주제에 맞게 해 주어야 하며, 연주자 모두가 같은 감정을 가지고 표현해야 본래의 의도가 듣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낭만주의 시대 작곡자들이 많이 시도하던 프로그램 뮤직과 비슷한 의도인데요 (예 : 스메타나의 몰다우 같은 곡), 곡의 노래나 연주 등 그 곡에 포함된 모든 소리에는 그 곡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나타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뒤로 만들어지는 곡들은 될 수 있는대로 그런 철학에 의하여 완성되었고, 그와 함께 저희는 연주에 상당한 자신감도 가지게 되었으며,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20대 초반의 저희들 실력이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면들을 모두 잘 표현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는데 모두 공감했습니다.

얘기가 약간 지루했지요?

하지만 Fevers 얘기에는 이런 내용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서…

지금 ‘산’이란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단, 다른 사람이 없을 떄 혼자서만 들어보셔야 합니다.

어느 깊은 산의 맑은 날 오후. 작은 산장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처음 음악이 시작되면서 고요한 산에 바람소리 들리고 사방이 온통 적막한 느낌이 드는지 느껴보십시오. 소리를 내어 외쳐보면 메아리도 들리고…

첫 노래부분이 끝나면 바람이 거세지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는지 보시고, 기타 솔로를 들으시면서 어느새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무서운 산으로 변해있는지 느껴보십시오. 혹시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찾으실 수 있으면 찾아보세요.

그러다 비가 그치고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산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지만 내 맘에는 산에 대한 사랑이 물밀 듯 격렬하게 몰려오는지 느껴보십시오.

어떻게 느끼셨나요?

여러분들이 7분동안 산의 다양한 면을 앞에 설명한 바와 같이 느낄 수 있었다면, Fevers의 음악이 제대로 여러분께 전달된 것이겠지요. 아님 말구요.

 

10.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1977년 봄 제가 레크리에이션연구회라는 대학 서클에 들어갔을 때, 좀 괴짜 선배가 한 사람 눈에 띄었습니다. 교련복을 입고 도수높은 안경을 끼고, 잘 웃지도 않으면서 남의 얘기에 딴지도 많이 걸고, 때로는 구석에서 하루 종일 기타만 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최용석

저보다 1년 선배인 신학과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서클에서 Song 부장을 맡고 있었고, 저는 활발히 활동하던 1학년 중 유일한 Song 부원이었기에, Song 부 집회를 하면 둘이서만 했습니다.

당시 서클의 임원단은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였습니다. 따라서 용석이형의 동기들은 1977년 2학기가 되자 임원단을 구성하기 위한 동기회의를 했는데 (저는 어쩌다가 그 회의에 곁다리로 끼어 조용히 있었죠),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걸 보고 용석이형이 스스로 회장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저녁 저와 술을 마시다가 제게 한 얘기가 충격이었습니다. 신장염으로 시작된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데 심한 정도라고 하네요.

술도 담배도 과로도 스트레스도 안된다고 의사가 말했다며, 저한테 부탁을 한가지 하더군요.옆에서 보다가 술이나 담배에 손 대려 하면 말려달라고. 그리고 과로나 스트레스도 곤란하니까 일을 많이 도와달라고. 저는 ‘그럼, 왜 회장을 맡았어요?’라고 원망섞인 소리를 해대며 무조건 그러겠다고 했지요.

회장을 하면서 용석이형은 선후배들이나 동기들과 마찰이 많았습니다. 고집도 강했고 독선적인 면도 있었거든요. 다른 회원들과의 가장 큰 대립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서클은 여름마다 대학생들 모집하여 1주일 캠프를 갔는데, 시설이 너무 빈약하여 부끄럽다는 것. 따라서 축제 행사 사회라든지 행사 기획이라든지 하는 우리 서클로 의뢰가 들어올 때 돈도 많이 받고 일을 해주어야 하며, 축제 기간에도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맞는 얘기지만 희생도 큰 것이어서 많은 대립과 의견 충돌이 있었던 거지요.

그러한 용석이형의 정책의 일환으로 열린 것이 1978년 3월 17일 78학번 신입생들을 위한 무악골잔치였습니다. Fevers 이야기 2부에 나오는 얘기지만 이 무대가 Fevers의 데뷔 무대가 되었지요. 용석이 형은 그룹사운드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자주 저희들의 근황을 물어보며 잘되기를 빌어주었습니다.

용석이형의 정책은 5월 축제에서 실효를 거두어 저희는 돈도 많이 벌었고, 여름 캠프에서는 식판, 텐트, 본부텐트 등을 모두 장만하여 그럴 듯한 캠프를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용석이형의 1년동안의 회장 생활은 본인이 약속한대로 다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회원들과 트러블이 있었고, 그러다가 술도 담배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가끔씩 회원들과 회의하며 싸우다가 끝나면, 저랑 술 마시면서 한참 말없이 술잔을 들여다보다가 저를 쳐다보며 ‘야 임마. 너도 내 맘 모르겠니?’ 라고 힘없이 묻는 일이 참 많았습니다. 지쳐 보였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임원생활을 마치고 1년 후배인 저희 기수에게 임원단을 물려준 용석이형은 78년 2학기 들어 한 달 여 지난 10월 중순 경 갑자기 신장의 상태가 악화되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저희는 거의 매일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서클 걱정을 하더군요. 누가 사회보러 나간다고 하면 ‘얼마 받기로 했냐?’ 하면서 너무 액수가 작으면 서클 지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것이라며 투덜거리기도 했지요.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서 별로 환자같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11월 중순 경 신과대 축제가 있었습니다. 신과대에서는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Fevers를 초청했고, 사회로는 용석이형과 또다른 신과대 소속 저희 서클 사람을 세우려 했지만, 용석이 형이 나올 수 없어 다른 사람 혼자 사회를 보기로 했지요.

신과대 축제날. 미리 장비 세팅하고 준비마치고 시작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입구에 길다란 검은 코트를 걸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환자복 위에 코트만을 걸치고 세브란스 병원을 탈출한 용석이 형이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던 신과대를 위하여, 자신이 사랑하던 서클의 이름으로 사회를 보러 온 것이지요. 자신이 첫 무대 만들어주었던 Fevers도 오랜만에 다시 만나 얘기도 많이 했습니다. 해변가요제 입상한 것 축하도 해 주고…

그런 상태로 기타를 메고 사회를 보며 Sing Along을 하던 용석이 형은 Fevers의 반주에 맞춰 춤까지 추고는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저희는 용석이 형이 지난 밤부터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찾아가보니 저희가 온 것 알아보지도 못하고 몸을 구부리고 옆으로 누워만 있었습니다. 저희는 한마디도 못하고 그냥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저희는 용석이 형이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울면서 용석이형 빈소를 지키고, 장례식을 마쳤습니다. 장례식때 신과대 남성복4중창단이 부르던 ‘순례자의 노래’는 오랫동안 제 가슴에 여운으로 남아 있었지요. 장지까지 다녀온 저희 동기들은 용석이형 회장시절 싸우던 생각이 나서, 용석이형 잘가던 술집에 모여 평소 용석이형 잘 부르던 노래를 부르다가 (친구, 아침이슬 등) 통곡을 하며 울기도 했습니다.

한달 정도 지난 12월 31일.

저는 오후에 시내에서 볼 일을 보고 집에 돌아오려고 미도파 백화점 앞에서 응암동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바람부는 한 겨울 시내에는 잎이 온통 떨어진 가로수들만 서 있고 사람도 많지 않았으며, 버스에도 손님이 저 혼자였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용석이 형 생각이 나며 멜로디와 가사가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얀 날개를 휘저으며, 구름 사이로 떠오네’

‘떠나가버린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그러면서 갑자기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르데요.

종이에 그 멜로디를 적으려고 주머니를 뒤졌는데 필기구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에까지 가는 동안 그 멜로디와 가사를 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외우자니 계속 그 노래를 불러야 하고, 그 노래를 부르자니 자꾸 눈물이 나고…

텅빈 버스 뒷자석에 혼자 중얼거리면서 연신 눈물을 훔치는 저를 보며, 기사분이나 안내양이 이상하게 생각했겠지요.

집에 와서 바로 노래를 완성하고, 그 곡을 들고 말죽거리로 갔습니다.

Fevers 멤버들은 모두 괜찮은 노래라고 하며 곡을 연주하기로 했고, 용석이 형을 아는 사람들은 형 생각 때문에 침울해지기도 했습니다.

편곡에 들어갔는데, 역시 문장곤 군이 공을 많이 세웠지요.

당시 문장곤 군 집에는 외할머니께서 함께 살고 계셨는데 집에 가서 할머니께 여쭈어 보았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장례를 치르고 상여가 나갈 때 어떤 소리들이 나는지…

할머니께서는 처음 상여를 운반할 때 앞의 지휘자가 종소리를 울리면 상여꾼들이 움직이며, 상여꾼들은 처음 상여를 들 때 ‘허이~’ 하는 소리를 낸다고 하셨답니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던 저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내용 알려주신 할머니께서 아주 큰 공을 세우신 거지요.

그것을 그룹에서 가장 가까운 소리로 표현한 것이 처음 음악 시작부분에 들리는 심벌 소리 (종소리 대신)와 이명훈 군이 육성으로 넣은 ‘허~’하는 소리였습니다.

노래 중간의 간주 부분은 무당의 진혼굿과 같은 느낌을 살리기 위해 넣은 것이고, 거기에 기타 연주는 안타까움과 애절함을 표현하는 소리였습니다.

이 노래는 79년 5월 앨범으로 나왔습니다.

원래는 제목을 용석이형이 묻힌 곳의 지명을 따서 ‘퇴계원’이라고 했는데, 레코드사 사장님께서 제목을 바꾸는게 어떠냐고 하셔서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 되었습니다. 선배를 친구라고 했다고 해서 용석이 형이 화내지는 않겠지요. 제목을 바꾸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 지역에 살고 계신 분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리고 노래 중간의 가사도 바뀌었습니다. 원래 가사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품었던 젊은 꿈은 가슴에 안은 십자가에 묻혀져 버렸네’ 였거든요.

이걸 역시 사장님께서 바꾸자고 하셔서 현재의 가사로 바꾼겁니다.

음반이 나온 후, 저와 레크리에이션 연구회 사람들은 음반을 들고 용석이 형 찾아가 그 무덤 앞에 음반을 파묻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용석이 형 찾아간지도 오래되었군요. 기회가 되면 이명훈 군, 문장곤 군과 함께 찾아뵙고 술이라도 한잔 올려야겠네요.

 

11. 그룹사운드의 봄

 

유신의 마지막 해가 된 1979년이 밝았습니다.

1980년대엔 100억불 수출과 국민소득 1000불을 달성하자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숨가쁘게 달려와 국민소득 1000불을 1978년에 조기달성하고 초고속 성장을 당연스럽게 생각하던 때였지요. 또 한편으로는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도 한곳으로 몰려 1978년 겨울에 있었던 총선에서는 제1야당이던 신민당이 총득표수에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에 1.1% 앞서 정가가 술렁이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1979년의 봄이 대학가 그룹사운드들에게는 정말 따스한 봄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78년 12월 저희들의 콘서트가 성공리에 끝나자, 가요제 출신 그룹사운드의 콘서트가 줄을 이었습니다. 해변가요제 출전했던 블랙테트라와 런웨이가 각자 독자적인 콘서트를 가졌고, 장남들과 블루드래곤즈는 조인트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저희 때와 마찬가지로 해변가요제 출신 그룹들은 모두 찬조 출연을 하였고, 사회도 주병진 군이 도맡아 했습니다. 또한 1977년 제 1회 대학가요제에서 우승한 샌드페블즈의 멤버들은 ‘화랑’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역시 콘서트를 가졌습니다. 샌드페블즈는 대학 서클이기 때문에 1년 활동 후에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각 팀들은 모두 음반을 냈거나 준비하고 있었고, 각 콘서트에서는 자신들의 신곡을 들고 나와 연주를 했는데, 좋은 곡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샌드페블즈(화랑)의 ‘저 새’, 블랙테트라의 ‘젊은 태양’, 런웨이의 ‘이빠진 동그라미’, 장남들의 ‘강건너 등불’ 등 당시 새롭게 어필하던 노래가 많았지요. 저희들도 '그대로 그렇게'와 함께 '내사랑 영아', '동해의 아침' 등을 많이 불렀고,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 완성된 후에는 그 곡도 여러번 연주했습니다.

1979년 1월과 2월에 연속적으로 대학 그룹들의 콘서트가 열리면서, 다른 그룹들이 찬조출연을 하니까 그 콘서트에 가면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그해 겨울방학은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참 기쁜 계절이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반면 그 부모님들에게는 정말 지겨운 방학이었겠지요. 엄마와 중학생 딸의 대화를 상상해 봅니다.

엄마 : 아니, 넌 오늘도 또 나가는거니?

: 응, 오늘은 블랙테트라 콘서트가 있어, 친구들과 보러 가요.

엄마 : 블랙테트라가 뭔데?

: 해변가요제에 나와서 우수상 탄 그룹이예요.

엄마 : 해변가요제 나온 그룹은 지난번에 드라마센터에서 봤잖아?

: 그건 Fevers구요, 이번에는 블랙테트라예요.

엄마 : 그게 그거지. 콘서트 있을때마다 보러 갈거니? 공부는 언제 하구? 지난번에는 2시간만에 온다고 하고는 6시간씩이나 있었잖아?

(설명 : 딸은 2시간 짜리 공연 보러 갔다가 화장실에 숨었다 나와 또 보느라고 늦게 왔음)

이젠 부모가 되셨을 그 따님들 자신들의 아들 딸들에게는 뭐라고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그 많은 그룹사운드 사이에서 가요제 출신도 아니면서 과감하게 데뷔를 한 그룹도 있었습니다.

작은 거인

대학가 기타의 귀재 김수철 군 등 4명으로 구성된 그룹이었지요.

1979년 2월. 데뷔부터 거창하게 문화체육관을 빌려 콘서트를 열었고, 대부분의 대학 그룹들을 찬조로 출연시켜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습니다.

당시의 에피소드 하나.

작은거인의 기타리스트 김수철 군은 화려한 무대 매너와 기타 실력으로 라이브에 강한 가수였는데, 이빨로 기타를 물어뜯고 병으로 연주하고 하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 그날 자신의 기타를 이빨로 연주하다가 기타줄을 하나 끊어뜨렸습니다. 그 곡을 마치고 바로 다음 곡을 연주해야 했기에, 기타줄을 갈아 끼울 틈이 없어, 저희 박호준 군의 기타를 빌려서 연주를 했지요. 그런데 또 기타줄을 끊어 뜨린겁니다. 바로 다음이 저희 무대였는데, 박호준 군은 기타줄 하나 모자란 채 연주를 하는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장남들과 블루드래곤즈의 조인트 콘서트 때인가요? (가물가물) 저희가 찬조로 나와 연주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된 겁니다. 캄캄해진 무대에서 기타소리도 키보드 소리도, 마이크를 통해 나오는 노래소리도 안들리는데, 드럼만 혼자 신나게 치는 소리가 들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때 콘서트 열심히 다니시던 분들 그랬던 기억 안나세요?

콘서트 마다 두툼한 노트를 가지고 와서 사인 받는 학생들의 행렬은 여전히 길었습니다. 학생들끼리 누가 많은 사인을 받는지 경쟁을 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친구와 둘이서 서로 비교해 보며 친구는 받았는데 자신은 받지 못한 사인이 있는지 점검하는 학생들도 보았거든요. 콘서트에서 음악 듣는 것보다 사인 받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은 방송 출연도 참 많았습니다.

TV는 아직 트로트 가수들의 무대였고, 가끔씩 통기타 가수들이 출연하는 정도였으며, 그룹사운드는 거의 출연하지 못했습니다. 영 11, 젊음의 행진 같은 프로그램은 80년, 81년에 가서야 생겼구요. 따라서 아직도 저희 무대는 라디오였는데, 주로 TBC 방송에 많이 출연하였고 MBC 에도 가끔씩 출연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슬슬 유명해지고, 콘서트 등으로 통해 얼굴이 알려지면서 곤란한 일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같은 대담 형식의 프로그램은 문제가 없는데, ‘노래하는 곳에’와 같은 공개 프로그램에는 학생들이 모여들기 때문이지요. 방송을 끝내면 학생들이 사인을 받으려고 기다리는데, 방송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걸 싫어하기도 하고, 이명훈 군 같은 경우는 붙잡히면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엔지니어 실 같은 곳에 숨곤 했습니다. 그러면 수위아저씨가 학생들을 방송국 바깥으로 쫓아냅니다. 학생들과 수위아저씨의 숨바꼭질이 한참 진행되는 동안 저희는 숨어서 못나갔지요. 그 와중에는 수위아저씨 피해 화장실에 숨었다 발각되는 학생들도 있고…

30분쯤 지난 뒤 수위아저씨가 ‘이제 너희들 가도 되겠다’라고 하면 방송국 문을 나섭니다만, 문 앞에는 어김없이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지요. 그래서 저희들은 방송국 나서기 전에 근처의 다방 한 군데를 약속하고, 문을 나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어 도망갑니다. 물론 제 뒤를 쫓아오는 학생은 없고, 대부분 이명훈 군을 쫓아가지요. 하지만 이명훈 군은 100미터를 12초 대에 뛰는 실력이어서 여학생들이 따라 잡기 어려웠을 겁니다.

10분 뒤 다방에서 만나 차를 마시며 앞으로 계획 등 이야기 하고 있으면, ‘손님 중에 이명훈 씨 계세요?’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미성년자라서 다방에 들어오지 못한 학생들이 다방으로 전화를 건 것이지요. 그렇게까지 열성적인 팬들은 다방 앞에 나가 잠시 만나고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TBC 방송국에서 PD 아저씨를 도와주던 여자분이 한 분 있었습니다. 저희보다 1살 어리고 박호준, 오택관, 송용섭 군과 나이가 같았는데, 해변가요제 때부터 저희를 눈여겨 봤다고 하데요.

저희가 갈 때마다 좋은 얘기해주고, 방송국에 익숙치 않은 저희들 위해 돌아가는 얘기도 많이 해 주었습니다.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좀 남자 같은 면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데 저희는 ‘인디언 여자’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지요. 저희들이 개구장이들이라 장난을 많이 쳐도 그냥 웃기만 하고, 저희들 인기관리를 위해서 애도 많이 써 주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지난 번 열린음악회를 보셨을지… 보셨으면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12. 새 음반 준비 작업

 

1978년 9월에 만들었던 독집 음반은 판매도 부진하였고, 잘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저희들은 그저 독집음반을 낸다는 사실에만 너무 흥분하여, 계약 내용도 제대로 모른 채 작업을 했었고, 이일권 군의 입대 일정 등으로 너무 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에, 충분하게 곡을 소화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녹음을 했었습니다. 따라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너무 많았지요. 그 앨범에 실렸던 곡들은 차라리 78년 12월의 콘서트를 통하여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내사랑 영아’나 ‘동해의 아침’ 등이 라디오 방송에 간간히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저희들은 새롭게 독집 앨범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78년 가을부터 차분하게 곡들을 준비해 두었지요. 일단 곡을 준비해서 우리 것으로 소화한 다음에 레코드사와 계약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저희 생각이었습니다.

‘산’과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 준비가 되면서, 저희들은 다른 곡들도 선정하여 연습을 하였습니다.

젊음의 노래는 원래 ‘젊은 태양’이란 제목으로 만들어 두었던 것인데,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도 ‘젊은 태양’이란 곡이 나왔고, 블랙테트라도 같은 제목의 곡이 있어, 제목을 ‘젊음의 노래’로 바꾼 것입니다. 제목을 바꾸면서 가사도 몇 군데 손을 보았는데, ‘저 하늘을 불사르는 태양을 보아라, 뛰는 가슴 솟구치는 젊음이여’라는 부분은 이명훈 군이 바꾸어 넣은 것입니다. 원래가사보다 부르기 쉽고 훨씬 좋더군요.

이 기회에 말씀을 드리면, 저는 처음 곡을 만들때의 ‘동기’를 중요시하고 그 느낌이 편곡,연주,노래에 모두 반영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노래 녹음을 할 때에도 각 소절을 만들 때 변화되어가던 감정을 다시 얘기해주어, 꼭 그 느낌을 가지고 노래를 하도록 요구하지요.

, 그 느낌을 더 잘 살릴 수 있다면, 제가 만든 곡이나 가사의 일부를 바꾸는 것은 찬성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느낌을 나타내는 표현력이란게 사람마다 일정부분 한계가 있어서, 작곡자가 좀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그 느낌에 몰두하여 오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그런 부분들을 다른 사람이 보완해 줄 수 있다면, 곡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지요. 이명훈 군이 그런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내마음 항상’은 박호준 군의 최초 작품인데, 느린 기타 연주가 일품이지요. 멤버들과 연습을 함께 하던 중 기타를 치면서 한 소절 만들고 또 연주하고 한 소절 만들고 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저는 주로 혼자 있을 때 노래가 만들어지는데, 박호준 군은 여럿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만들더군요. 다른 멤버들은 박호준 군이 악상을 잘 떠올릴 수 있도록 보조 역할을 해주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역시 기타리스트가 노래를 만드니까 기타와 노래의 조화에 신경을 많이 썼더라구요. 서로의 어울림이 아주 괜찮은 곡이었습니다. 박호준 군은 가성으로 화음을 넣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이 곡에서도 역시 화음을 넣는 부분을 만들었습니다.

‘0시 5분전’이란 노래는 이일권 군의 작품으로서, 78년 9월 이일권 군과 함께 녹음을 했었는데, 음반에는 나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도를 했는데, Funky Style 로 리듬을 바꾸어 연주를 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특이한 리듬과 형식을 가진 노래였지요.

‘사랑의 전설’과 ‘시골로 가자’는 고등학생 시절 만든 곡을 78년 9월 음반에서 사용했었는데, 간주 부분을 새롭게 바꾸어 다른 맛이 나도록 했고, ‘우리 모두’는 그냥 가볍게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을 쉽게 만들어 넣었습니다.

‘해지는 바닷가’는 78년 연포 해변가요제가 끝난 직후 레크리에이션 연구회에서 주최한 여름 하기캠프 (7/24 – 29)에서 만든 노래입니다. 대학생들을 100명 정도 모집하여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캠프를 개최하는데, 매일 저녁마다 저녁식사 후 1시간 동안 ‘석양의 데이트’라는 것을 합니다. 남학생 1명, 여학생 1명을 짝지워 바닷가로 내 보내서, 1시간쯤 해지는 바닷가를 산책하다 돌아오는 것이지요.

당시 저는 조장을 맡고 있었고, 캠프 전체 남학생들이 여학생보다 약 7-8 명쯤 많아 본부 임원과 조장들은 데이트를 못했거든요. 그런데, 금요일 마지막 석양의 데이트에 갑자기 제가 호명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예쁜 여학생의 파트너로… 당시, ‘석양의 데이트’를 맡아 진행하던 3학년 선배누나가 저 고생 많이 한다고 선물 삼아 해 준 것이지요. (이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

근데, 문제는 그 여학생을 점찍어 놓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제 친구 녀석이었습니다. 그 친구도 조장이었고 그날 데이트를 못했는데, 저희가 데이트를 하니까 배가 아파서 가는 곳마다 쫓아다녔지요.

돌 던지고 모래 뿌리고 하며 쫓아보내도 계속 쫓아오는 통에 결국 데이트는 3명이 같이 했는데, 얘기는 지들 둘이 다하고, 저는 외톨이 처럼 해지는 광경만을 바라보다가, ‘해지는 바닷가’라는 노래를 만들었지요. 그후 제 친구도 그 여학생과 헤어졌으니, 결국 제가 남는 장사 한거겠지요?

‘해지는 바닷가’에 나오는 풍경 묘사는 그때 보고 느낀 것 그대로입니다. 참 아름다웠거든요. 구름위로 퍼지는 노을, 바다위로 깔리는 햇살…

‘해지는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고’라는 부분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뭐 제 입장에서는 아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전체적으로 편안하면서도 좀 장난스러운 느낌인데, 역시 곡 만들때 친구들의 장난스러움이 배어 있나봅니다.

이러한 곡들과 ‘그대로 그렇게’ 리메이크한 곡 합쳐 모두 10곡으로 음반을 내기로 하고, 78년 9월에 했던 레코드사가 아닌 새로운 레코드사와 일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레코드사는 젊은 음악인들의 음악을 많이 만들던 서라벌 레코오드사였습니다.

기술부장으로 계시던 분이 방기남 선생님이라고 ‘산새들이 정다웁게 웃고 ~’ 하는 노래 (제목이 생각 안나네요) 등 다수의 곡을 만드신 분이었습니다. 저희들 음악을 들으시고 높이 평가해 주셨지요.

처음 그 레코드사의 사장님을 만나는 날, 사장님께서 저녁을 사주셨는데 (불고기와 맥주), 인상에 남는 말씀을 하나 하시더군요.

“너희들은 음악인이지만 나는 장사꾼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장사꾼이라 할지라도, 음악을 파는 장사꾼이지 판을 파는 장사꾼은 아니라는 자부심에 산다”

젊은 가슴에 그 말씀이 참 멋있게 들려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13. 말죽거리 잔혹사

 

1978년 11월부터 우리들의 연습장소가 되었던 말죽거리는 일반 가정집이었는데, 2층에서 저희가 연습을 하였고, 2층 마루에 악기를 설치했었습니다. 모여서 의견을 나눌때는 그 옆의 방을 이용했는데, 그 방 한 가운데 장판이 동그랗게 떨어져 콘크리트가 드러난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 부분을 재떨이로 사용했습니다. 새로운 곡이라도 가져가는 날이면, 그 방에 둥글게 앉아 악보를 들고 심각하게 토론을 하면서 연신 담뱃재를 방 한가운데 콘크리트 부분에 터는 광경은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모습이었을 것 같네요.

새로운 음반을 준비하기 위하여 맹연습을 하였는데, 연습을 하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어 서로 언성을 높이게 되는 경우도 있고, 계속 반복해서 개인 연습이나 단체연습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편곡 관계로 아이디어를 도출하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거나 하다 보면 아무래도 담배들을 많이 피우게 되지요. 그래서 음악하는 사람들 담배 끊기는 어려운가봐요.

음악 연습은 주로 문장곤 군이 주도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사운드 조절하고 새로운 리듬 찾고 하는데 뛰어나거든요. 그리고 문장곤 군은 연습벌레여서, 정말 무섭게 연습도 많이 했습니다. 혼자만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사운드가 제대로 나올때까지 멤버들 모두 함께 똑 같은 것을 반복해서 또 하고 또 하고…

그렇게 문장곤 군(쟌)이 멤버들을 연습으로 혹사시켰다고 해서, 그 당시의 (1978년) 얘기를 영화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말죽거리 쟌 혹사’. 전 아직 못 봤는데, 혹시 보신 분 계세요?

그곳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참 힘든 곳이었습니다. 버스 종점에서 30분을 걸어와야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그곳을 찾아오는 열성팬들이 있더군요. 모두 여중생이나 여고생들이었는데,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3-4명 또는 5-6명 씩 찾아왔습니다. 케익, 라면 1box, 담배 등의 선물을 사들고…

아침 10시나 11시 쯤되면 학생들이 나타나는데, 2층으로 올라와 저희 연습하는 것 듣고 점심때가 되면 저희들과 함께 라면 먹었지요. 찾아온 학생들은 각자 대접에 한 그릇씩 주었고, 저희 멤버들은 큰 솥에 함께 끓여서 가운데 두고 둥글게 앉아 각자 그릇과 젓가락 들고 떠먹었습니다. 날이 따뜻할 때면 점심 먹고나서 그 앞길로 함께 산책을 하기도 했지요. 찾아오는 학생들도 좋았겠지만, 저희 멤버들도 1주일 내내 연습하다가 새로운 얼굴들 보는게 꽤나 큰 위안이 되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그룹사운드 콘서트가 한창이던 것을 생각하면, 학생들 입장에서 연습장소를 찾아오는 것은 꽤나 남는 장사였을겁니다. 콘서트 한번 보러가면, 줄서서 1-2시간 씩 기다렸다가 막상 구경하는 콘서트는 2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지요. 그리고 입장료가 거의 2000원 정도 했으니까 4명 친구들이 가면 8천원이 소요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말죽거리를 찾아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으니까 일단 콘서트 3번 정도 보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데, 소요비용은 버스비와 선물비용 뿐이었지요. 당시 라면 1개에 100원이 안 됐으니까 1 box면 2500 ~ 3000원 정도 됐을겁니다. 담배는 300원이었으니 10갑이면 3000원이었을거고, 케익 값은 모르겠네요. (당시 케익을 사본 경험이 없음) 어쨌든 8000원 보다는 훨씬 싼 값으로 3배의 시간을 놀 수 있었지요.

거기다가 공짜 점심도 먹을 수 있고, 듣고 싶은 노래 신청해서 들을 수도 있고, 아직 발표가 되지 않은 신곡도 남들보다 먼저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니, 팬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매력적인 방문이었을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팬들은 저희 연습하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스스로 잘들 지켜, 그냥 조용히 저희 연습광경을 지켜보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찾아오는 학생들 중에 직접 만든 노래가사를 들고 곡을 붙여달라고 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제가 남의 느낌을 공유하고 거기에 노래를 붙이는 것을 해보지 못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마 살아온 경험이 적어서 그랬겠지요. 지금 생각하니 참 죄송한 일이네요.

또한 설거지를 도와준 학생들도 있고 청소 등을 함께 한 학생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학생들이 그때 집에서도 어머니를 그렇게 도와드렸는지는 알수 없으나, 참 기특하고 훌륭한 학생들이죠? 아마 지금쯤 훌륭한 인물들이 되어 있거나 훌륭하게 될 인물들을 키우고 계실거라 생각됩니다.

 

14. MBC TV 쇼 진출

 

봄이 되면서 저희는 MBC 에도 진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2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 등 라디오 프로에 먼저 나가고, 3, 4월쯤에 토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TV 쇼프로에도 나갔습니다.

MBC에 나간다는 것은 중대한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사실 처음 MBC에 갔을 때, 한 PD 아저씨는 ‘너희들은 삼성 그룹이잖아?’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삼성’이란 말도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을때였는데 (제일모직,제일제당,중앙일보,동양방송,동방생명,신세계 등 이름들도 각자 따로 썼음), 좀 당황스러웠지요. 같은 민방이라서 MBC와 TBC의 경쟁이 치열했던 때였고, MBC의 대학가요제 인기를 보고 TBC에서 해변가요제를 만들었기 때문에, TBC 해변가요제 출신으로서 MBC의 메인 쇼프로에 나간다는 것은 방송국 간의 벽을 넘어섰다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또하나의 변화는 휘버스라는 이름으로 MBC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당시는 한글 이름을 많이 권장할 때였는데, TBC와 달리 MBC는 자사 방송에 출연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글 이름으로 출연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Sand Pebbles는 ‘모래와 자갈’, Runway는 ‘활주로’, Black Tetra는 ‘검은 열대어’, Blue Dragons는 ‘청룡들’ 등의 이름을 썼고, 기존의 가수들도 ‘양파들’, ‘금과은’ 등의 이름으로 바꾸어 출연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Fevers를 한글로 바꾸기는 참 어려웠습니다. 사전에 나온대로 하면 ‘열기들’인데 의미도 다를 뿐 아니라 말이 잘 되질 않고, ‘열정들’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는 비슷하지만 영 이상했지요. ‘열병들’, ‘열병 앓는 사람들’이란 아이디어도 나왔고 참 고민스러웠습니다.

저는 이름 짓는데 좀 문제가 있나 봅니다.  ‘그대로 그렇게’라는 노래 제목을 사람들이 제대로 아는데 참 오래 걸렸거든요. ‘그래도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그냥 그대로’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퇴계원’은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으로 바뀌었고, ‘떨어진 조개껍질’도 ‘사랑의 전설’로 바뀌었던 걸 보면, 제목 붙이는데 아마 미숙했던 모양입니다.

Fevers를 한글로 바꾸면서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생각하며 속상했습니다. ‘열’이란 말이 안들어갈 수가 없는데, 들어가면 촌스럽거나 이상해졌거든요. 그때 출연했던 MBC의 TV 쇼에서는 PD 아저씨가 좋은 이름이 있다면서 “너희들은 ‘용광로’로 하는게 어떠냐?”라고 하며 그 이름을 붙여주어, 그날 자막에는 ‘용광로’라는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또한 MBC는 정동 22번지에 있던 방송국 건물 지하에 이발소가 있었습니다. 그 이발소는 사람들을 멋지게 가꾸어주기 위해 있는 이발소가 아니라, 장발을 TV 출연 규정에 맞게 잘라주는 곳이었지요. 출연하러 MBC에 가면 PD 아저씨가 보고 ‘지하실 다녀와라’ 하면 이발소에서 머리 자르고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굳이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당시에는 모두 귀를 덮는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귀가 보인다든지 뒷머리가 올려쳐져 있으면 영 어색했거든요. 그런데, ‘귀가 보여야 한다’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될 때라서 이발소에서는 전체의 모양이 너무 이상해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귀를 덮은 머리카락만 도려내곤 했지요.

이발사 아저씨도 참 수입이 괜찮았을 겁니다. 젊은 출연진들 대부분 머리 자르러 왔는데, 실제 머리를 자르는 시간은 10분도 채 안걸렸거든요.

저희 멤버들은 특별히 장발을 한 사람은 없고 보통 대학생 머리 정도였는데, 그래도 송용섭 군, 오택관 군, 문장곤 군 등이 내려가 귀 쪽을 동그랗게 도려내고 온 걸로 기억됩니다. (기억이 가물가물) 저는 출연하는게 아니라서 깔깔대고 웃기만 했지요. 머리를 두툼하게 덮인 머리카락 중에서 귀만 쏙 빠져 나온게 참 이상했거든요.

그날 작은거인이 TV에 데뷔하는 날이어서 ‘일곱색깔 무지개’를 녹화했는데, 라이브에서 그렇게 연주 잘하던 작은거인이 이상하게 자꾸 틀려서 7번을 다시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바로 다음 타임 녹화였었기 때문에 저희는 준비를 하고 오래도록 기다려야 했었거든요. 저희는 당시 여기저기 다니며 ‘그대로 그렇게’를 지겹도록 연주할 때라 한 번만에 녹화를 마쳤습니다.

PD 아저씨 왈 “작은 거인은 ‘일곱색깔’ 노래를 하니까 일곱번을 녹화해야 하고, ‘그대로 그렇게’ (= 편하게) 노래하니까 한번에 가는군”

그리고, 그 쇼의 출연진 중에는 해변가요제 1위 ‘징검다리’와 78 대학가요제에서 ‘한마음’을 부른 ‘고영선 임백천’이 있었습니다. 징검다리의 여성멤버 정금화 양과 고영선 군은 모두 교동국민학교 73회 동창들입니다. 78년 여름방학 때 모두 가요제 출전을 한 것인데,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동창회를 했지요. 그런데, 그 TV 쇼에서 재치있게 말을 잘 하던 왕영은 양과 임백천 군은 그 후 MC로 발탁이 되어 활동한 반면 저의 국민학교 동창들은 짝을 잃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번 2월 28일 창사 77주년 기념 ‘7080 보고싶다’의 사회가 임백천, 왕영은 씨네요. 오랜만에 만나 반갑기도 하겠지만, 짝잃은 고영선, 정금화 동창도 보고 싶군요.

 

15. 새로운 독집 녹음

 

1979년 초반은 상당히 바쁜 시절이었습니다.

갑자기 유행이 되기 시작한 그룹사운드 공연에 찬조출연하고, 방송 스케쥴도 많이 잡혀서 여기 저기 출연하고, 말죽거리에 틀어박혀 신곡들을 열심히 준비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렇게 준비하던 신곡들이 모두 준비가 되면서 드디어 Fevers 독집 디스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앨범 타이틀도 확실하게 Fevers로 하기로 했고, 다른 사람과 음반을 나누어 쓰는 일이 없도록 잘 얘기가 되었지요.

녹음실은 이촌동에 있는 한강 녹음실이었습니다. 당시 최신 건물과 최신 장비를 갖추고 녹음 기사분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분이었지요. 한강 바로 옆에 있었는데, 마장동 녹음실에 비해 깨끗하고 고급스런 분위기였습니다. 1978년 9월에는 하루에 연주와 노래를 다 녹음했는데, 이번에는 이틀에 걸쳐 연주를 녹음하고, 따로 날을 더 잡아 노래를 녹음하였습니다.

녹음하던 날은 서라벌 레코오드사의 방기남 부장님께서 오셔서 녹음 기사분과 함께 계속 녹음되어가는 음악들을 들어 주셨습니다. 가끔씩 지적사항도 주셨지만, 대체로 저희들 하고 싶은대로 놔 두시는 편이어서, 저희는 아주 편하게 녹음을 했습니다. 차라리 저희들끼리 소리가 맘에 안들면 중단하곤 했지요. 노래 한 곡 끝날 때마다 수고했다, 잘했다 하시며 용기를 주시던 방 부장님 생각나네요.

녹음 당일에는 저도 쫓아갔었는데, 가서 녹음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최신 악기의 하나인 Roland String Keyboard가 있었던 거죠. 별로 크지 않은 작은 건반 악기인데, 현악기와 관악기의 소리를 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MIDI가 아직 표준으로 제정되지 않을 때였고, 전자 악기로 현악기나 관악기 등 다른 악기 소리를 내는 것이 기술적으로 완성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룹에서는 전자올갠이라고 하는 악기만 썼는데, 이 String Keyboard는 현악기와 관악기 소리를 제법 그럴 듯하게 내 주어 저희들도 깜짝 놀랐지요.

녹음 직전 우리는 과감하게 Two 건반 시스템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졸지에 처음보는 String Keyboard의 연주자가 되어 오택관 군과 함께 둘이서 건반을 담당했습니다. 처음 쳐보는 악기였지만, 몇 번 연습해 보니 할만 하더군요. 오택관 군은 주로 리듬 부분을 담당하고, 저는 멜로디가 들어가는 연주 쪽을 나누어 담당했습니다.

‘사랑의 전설’, ‘우리 모두’, ‘그대로 그렇게’의 전주, ‘해지는 바닷가’에서 기타와 함께 하는 간주, 그리고 ‘젊음의 노래’, ‘산’ 등 많은 곡의 중간 부분에 포함되는 연주에 String Keyboard가 들어갔습니다. 음반을 들어보시면 이전 곡들에 비해서 좀 산뜻한 현악기 소리나 관악기 소리가 많이 들어 있을텐데, 그것이 String Keyboard의 역할이었습니다.

녹음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역시 ‘산’이었는데, 맛을 살리기도 힘들었고, 긴 곡을 여러 악기가 잘 맞추어 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번 녹음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보통 한 곡 녹음할 때 처음 setting하고 연습하고 녹음 마칠 때까지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산’은 2시간 이상 걸렸던 것 같습니다. 연주 부분이 많은데다 조화가 잘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남의 악기 소리를 열심히 들어가면서 그 사이에 자신의 소리를 맞추어 넣던 것이 생각나네요.

문장곤 군의 모습도 기억납니다. 의자에 앉아서 베이스 기타를 오른쪽 다리에 올려놓고 연주를 하다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다 보니 (전체 리듬을 맞추기 위하여) 오른쪽 다리가 자꾸 내려가서 나중에는 거의 한쪽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연주를 했어요. 열심히 하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곡의 녹음이 끝나고 제일 반가와 하신 분이 방기남 부장님이셨는데, ‘산’ 연주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고 하시더군요.

녹음된 곡은 모두 10곡으로서 ‘젊음의 노래’, ‘내마음 항상’, ‘해지는 바닷가’, ‘사랑의 전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0시 5분전’, ‘산’, ‘우리 모두’, ‘시골로 가자’, ‘그대로 그렇게’ 였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도 많이 했고, 곡 들도 신경써서 골랐고, 좋은 악기와 녹음 시설로 연주를 했기 때문에 78년 9월 녹음한 것에 비해 훨씬 만족스러웠습니다. 또한 박호준, 오택관, 문장곤 3명이 가성으로 넣은 화음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지요.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힘들었던 녹음이 끝나고, 4월,5월이 되면서 저희는 여러 대학의 축제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1년 전 1978년 봄에는 신입생환영회 1번, 단과대 수양회 한번이었던 것에 비하면 지명도가 많이 높아진 것이지요.

연세대학교, 동덕여대 등 많은 축제에 (다 기억이 나지 않음) 다니며 연주를 했고, 그때마다 높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다른 그룹과 동시에 초청이 되어도 저희 쪽에 학생들이 더 많이 모여드는 바람에 함께 초청받은 다른 그룹에게 미안한 적도 많았구요. 가요제 출신 그룹들과 마주치는 일도 많아서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장난을 치기도 하던 기억이 납니다.

주병진 군도 당시 사회를 보러 많이 다니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는데, 사회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방법 (간단한 게임 등)에 대하여 저하고 서로 정보 교환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제가 뭘 가르쳐 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주병진 군에게 배운 것은 손가락 스키타기 (노래부르며 손가락 2개로 사회자 따라 동작을 하는 것) 였습니다.

축제에 다니며 연주하는 것과 동시에 저희가 준비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문화체육관에서의 콘서트 였지요. 저와 문장곤 군은 당시 입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에 콘서트를 하기로 한 겁니다.

이번에는 78년 12월과 달리 기획사가 모든 준비를 맡아서 했고, 저희는 출연료를 받고 했습니다. 저는 당시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는데, 기획사에 주문을 하여 저도 출연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사실 무대에 오르지 않는 사람이 출연료를 받는다는게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멤버들이 그냥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1979년 5월 12일과 13일.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공연을 했는데, 78년 12월 5-600명 정도가 들어오는 드라마센터의 공연에 비해, 문화체육관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었습니다.

연주곡들은 78년 12월에 했던 곡들에다가 이번에 새로 녹음한 곡들을 섞어서 했는데, ‘그대로 그렇게’, ‘내사랑 영아’ 등은 여전히 인기가 좋았고, 음반 녹음 전부터 여러 무대에서 불렀던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과감하게 7분짜리 ‘산’도 발표곡에 포함을 시켰고 저는 그 사운드를 객석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녹음실이나 연습실에서 듣는 것과는 다른 맛이 나더군요. 멤버들은 무대에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연주하는데 저 혼자 편하게 들으니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문화체육관은 규모도 컸고 수용인원도 많았지만, 콘서트를 하기에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연을 염두에 두고 지은 곳이 아니라 소리가 흩어지고, 전체적으로 어수선했지요. 거기에 비해 드라마센터는 적은 인원을 수용하지만 짜임새 있는 무대가 객석과 하나되는 느낌을 주며 소리가 잘 전달되어 공연을 보시는 분 입장에서는 더 나았으리라 생각됩니다.

 

16. 뿔뿔이 헤어져서…

 

화려하고 바빴던 1979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면서 Fevers는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문장곤 군과 제가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입대를 하게 된 것이지요. 거기에다가 기타의 박호준 군과 드럼의 송용섭 군도 덩달아 팀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저야 멤버로서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큰 지장이 없었지만, 문장곤, 박호준, 송용섭 3명이 동시에 그만두게 된 것은 참 커다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명훈, 오택관 2 명만이 남아서, 쉬고 있던 김흥수 군을 다시 기타리스트로 데려오고, 베이스와 드럼을 1명씩 구하여 팀을 재구성하였습니다. 당시 ‘그대로 그렇게’는 각 TV 인기 챠트에서 1위를 향해 달리고 있을 때였고 (라디오에서는 1위를 이미 하였으나, TV에서는 좀 늦어 이때에 순위에 올랐음),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도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할 때여서, 활동을 중단할 수가 없었지요.

박호준 군은 팀을 탈퇴한 후 잠시 쉬다가 ‘동서남북’이라는 팀을 만들어 활동을 하였습니다.군에 있을 때 우연히 TV를 보며 한 그룹사운드의 연주를 듣다가 그 그룹의 기타리스트의 손목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고 박호준 군이 기타리스트로 포함된 그룹인 것을 알았지요. 길쭉한 직사각형의 특이한 시계를 차고 있었거든요. 동서남북 활동을 하다가 박호준 군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1984년 1월 초 미국 대사관에서 VISA 인터뷰하다가 저하고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지요.

송용섭 군은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가 80년대 들어 다른 팀에서 잠시 활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만난 한국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베이스를 치고 김흥수 군이 기타, 송용섭 군이 드럼을 치면서 함께 그룹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에 입대한 문장곤 군은 전방에 근무하면서, 사단 군악대 활동도 하고, 이런저런 힘든 보직을 많이 옮겨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이스를 칠 기회는 없었다고 하네요. 전방 근무라서 고생도 많이 했을 것이고, 서울에 자주 나올 수도 없었겠지요.

첫 휴가 때에는 크림빵 100개를 사서 제게 전해주려고 저희 부대에 면회를 왔었답니다. 일등병 때라 먹을게 항상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여 100개를 준비했다네요. 황당하기도 하지만, 참 고마운 얘기더군요. 그런데, 부대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했는지 그냥 돌아갔다고 합니다. 크림빵 100개는 엉뚱한 사람 주고…

저는 입대하여 훈련소 들어가기 전 수용연대에 있을 때 점심시간에 틀어주는 음악 중에, ‘그대로 그렇게’가 나오길래 옆에 있던 친구 (수용연대에서 만난 친구)에게 제가 활동하던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얘기가 온통 퍼져 저녁 먹고 군가 배우는 시간에 중대의 신병들 모아서 군가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챠트에 처음보는 군가 악보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그걸 보면서 저는 노래를 부르고, 기간병들이 제가 맞게 불렀는지 확인을 해 주면, 그 다음에 신병들에게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그 중 몇 명이 함께 훈련소에 가게 되어 또 얘기가 퍼지고, 후반기 교육, 자대 배치 때 까지 계속 Fevers 활동했던 얘기가 저를 쫓아다녔습니다.

훈련소에서 매일 박박 기던 중 하루는 밤이 되어 모두 누워 자고 있는데, 불침번이 저를 깨워 행정반에 가보라고 하더군요. 밤 11시가 거의 되어가는 시각이었고, 훈련병이 행정반 갈 일은 이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잘못되었나 하고 겁을 집어먹고 갔더니…

내무반장들이 모여 앉아 TV를 보면서, “야, 쟤가 네 친구냐?”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TV를 보니 ‘MBC 금주의 인기가요’에서 1등 먹은 Fevers가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TV로 보는 친구 얼굴은 참 반갑더군요.

후반기 교육 맨 마지막 이틀짜리 연막작전 교육 때의 일입니다. 이틀 동안 무거운 발연기를 (연막피우는 장비) 들고 산으로 올라가 지시에 따라 연막을 피우는 힘든 훈련이었지요. 아침에 교육장 도착하니까 조교들이 저를 따로 불러서, “이틀 동안 훈련을 빼 줄 테니까, 그 동안 ‘연막가’ 라고 하는 노래를 만들어 봐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료들이 모두 힘들게 훈련받고 있을 때에 저는 나무 그늘에 앉아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이틀 동안의 훈련이 끝나고 저는 조교들과 동료 교육생들 앞에서 만든 연막가를 불렀고, 그 노래를 조교 중 한 명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 연막가 만든 것에 대하여 후회를 참 많이 했습니다. 뒤에 들어온 후배들 얘기를 들어보니, 제가 떠난 이후 교육생들은 그 노래 외워 부르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더군요. “어떤 놈이 이런 것 만들어 가지고 우리를 고생시키냐”라고 투덜거리면서요… 혹시 이 글 읽고 계신 분들 중 ‘연막가’ 때문에 고생하신 분들 계시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는 자대배치를 부평으로 받아 근무했습니다. 산곡동.

그때만 해도 그 일대에 군 부대가 참 많았어요.

일등병 시절 어느 일요일. 누가 면회 왔더면서 주번하사가 여자 2명의 이름을 알려 주는데,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잘못된 모양이라고 정문에 재확인을 했으나 틀림없이 저를 찾아왔다고 하데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면회소를 가서 2명의 여자를 찾았는데, 없더라구요. 다시 정문으로 가서 위병 근무하는 고참에게 “없는데요” 했더니, 그 고참이 면회소로 직접와 입구에서 방문자 이름을 크게 부르는데, 한쪽 구석에서 2명의 중학생들이 일어나더군요.

얼굴을 자세히 보니, 말죽거리에 몇 번 찾아왔던 학생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편지를 보내오던 중학생도 있었고 TBC에서 PD 보조로 일하던 ‘인디언 여자’분도 면회를 왔습니다.

일요일에 서울에서 부평까지 물어물어 찾아왔던 고마운 그 학생들, 열심히 편지 보내던 학생, 인디언 여자분. 다들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혹시 이 까페에 오시지는 않았는지…

한편 친구들 군에 보낸 이명훈 군은 새로운 Fevers 멤버들과 함께 방송과 공연 등으로 바쁘게 보냈다고 합니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도 높은 인기를 얻어, 방송을 많이 탔지요. 그러다 1980년 2월인가 고별 공연을 마치고는 팀을 해산하고, 솔로로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79년, 80년초는 제가 훈련소, 후반기교육, 자대배치 받아 졸병시절 하던 때라서 외부 소식을 자세히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쓰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1980년 솔로로 독립하여 이명훈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하면서, 이명훈 군은 새로운 음반을 준비하였습니다. 솔로에 어울리는 신곡들을 5개 준비하였고, 예전에 했던 노래들을 추가하였더군요. 활동 범위를 넓히면서, 전의 Fevers 시절에 그룹 멤버들의 노래만을 불렀던 때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곡도 소화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사랑 찾아가네’, ‘내가 내가’, ‘말은 하지 않아도’ 등의 노래들이 새롭게 받은 곡들이지요. 이중 ‘내 사랑 찾아가네’는 이명훈 군 작사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작곡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사는 말죽거리 시절부터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별과 노래 그리고 너’, ‘가을에 온 편지’는 군 생활 당시 만들었던 노래들 가운데 두 곡이었는데, 이명훈 군이 솔로로 부르면 알맞겠다 싶어 추천했고 음반에 포함되었습니다.

1980년의 이명훈 솔로 음반은 전체적으로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노래들로 꾸며져 있어서, 혼자서 조용히 듣고 있기 좋은 음반입니다. 하지만 일반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아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 것 같더라구요.

그리하여, 1981년 가을쯤 이명훈 군은 솔로 활동보다는 다시 멤버를 모아 Fevers를 재건하여 그룹의 길을 가기로 하고, 새로운 음반을 준비합니다. 당시 이명훈 군과 저는 주로 편지로 가끔씩 얘기를 주고 받았는데, 군대에 있으면서 만들었던 노래들을 수시로 악보로 그려 보내주었습니다. 새로운 음반을 준비한다는 얘기 듣고는 그룹 연주에 맞는 곡 몇 개를 그려 보내주었고, 외박을 나가면 가끔 만나서 그 곡들에 대한 얘기도 하곤 했습니다.

군에서 이명훈 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대 말년인 1981년 크리스마스에 저희 부대에서는 부대 내에서 그룹을 만들어 전 부대원을 모아 공연을 하기로 하고, 제게 팀 구성과 연습, 악기 조달 등을 맡겼습니다. 악기를 다룰 줄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에게 악보를 그려주고, 연습시키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악기 조달이 문제더군요. 돈도 한푼 안 주면서 악기를 구해서 하라는 것은 참 황당한 얘기였습니다.

처음에는 며칠 간 통기타와 깡통 등으로 연습을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실제 악기를 가지고 연습하지 않으면 곤란할 듯했습니다. 그래서 외박을 내보내 달라고 하고는, 이명훈 군을 찾아갔지요. 그래서 이명훈 군과 함께 활동하던 매니지먼트 사를 통하여 낙원동에서 악기를 빌려 부대에 들어갔고, 며칠 간 그 악기를 가지고 연습하여 공연할 수 있었습니다.

부대 내 공연은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졌습니다. 당시의 대학가 노래들을 포함하여 약 1시간 반 정도 신나는 시간을 만들 수 있었지요.

나 어떡해, 연, 바람과 구름, 내가,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탈춤 등의 가요제 노래들과 화, 너, 사랑의 진실 등 70년대 초반 노래들.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조용필 선배님 노래들… 물론 그대로 그렇게와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도 포함되었습니다.

신난 군인들 나와서 춤추기도 하고 함께 노래하기도 하고. 그렇게 공연 마치고 악기 돌려주러 다시 외박 나가서 이명훈 군과 술 실컷 마셨던 것 같습니다.

1982년 초.

저와 문장곤 군은 비슷한 시기에 제대를 하여 우리는 다시 만났지요. 약 2년 반 넘게 뿔뿔이 흩어져 있던 동안 각자 다른 형태의 고생들을 많이 하였고, 그래서 다시 만난 얼굴들이 더욱 반가왔습니다.

그 마음을 어루만져 달래주듯 이명훈 군은 ‘다시 만난 날’을 새 음반에 포함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7. 다시 Fevers의 이름으로

 

1982년.

제대해서 보니 입대하기 전과 세상이 많이 달라졌더군요.

군에 있는 동안 10.16, 12.12 사태가 있었고, 광주사태 등이 이어지며 정치적 혼란기가 있었고, 유학자율화, 통행금지 해제 등의 조치도 있었습니다.

또한 1982년은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해이기도 하지요. OB 베어즈, MBC 청룡, 삼미 슈퍼스타즈, 삼성 라이언즈,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등 6팀으로 구성된 프로야구는 철저히 각 지방의 특색을 나타내며 감독과 선수를 모두 그 지역과 관련있는 사람들로 채우는 등 (해태의 김동엽 감독은 제외) 지방팬을 끌어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종도 선수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마무리되는 드라마와 같은 개막전은 일시에 전국의 팬들을 프로야구 경기로 끌어 모았습니다.

한편, 생활 수준도 많이 달라져서, 70년대에 흔히 찾아보던 막걸리 집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OB 베어, 크라운 패밀리 등의 생맥주 집이 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생맥주 500cc에 500원. 싸다…) 학교 앞에 삼겹살 집도 많이 생기고, 칵테일 바도 많이 생겨 진이나 보드카 등을 이용한 칵테일들이 많이 선보였습니다. 전반적으로 70년대에 비해 소비문화가 발달되고 흥청대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나이키, 프로스펙스 등 유명브랜드 들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나이스, 프로스포츠 등의 시장 패션들도 인기를 얻던 시절이었습니다. 70년대 유행하던 장발도 조금 짧아졌고, 깃 넓고 허리가 딱 붙던 웃옷도 헐렁해졌으며, 땅바닥에 끌리고 신발을 덮을 만큼 통이 넓던 바지들도 발목까지 올라가며 좁아져서 유명브랜드의 신발이나 양말들이 잘 보이게 되었지요. 요즘 많이 언급되고 있는 ‘웰빙’이란 것이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이명훈 군은 1982년 초 새로운 음반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Rock’n Roll 풍의 ‘얼굴빨개졌다네’는 ‘연’, ‘사랑하는 사람아’를 작곡한 조진원 군의 작품인데, 이명훈 군의 Rock’n Roll 소화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곡과 노래부르는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는 곡이었습니다.

그 외에 이일권 군의 작품들, 제가 만든 작품들을 포함하였고, ‘뿌리깊은 나무’는 이명훈 군의 작품으로 기억되는데, 음반에서 사용된 최초의 이명훈 군 자작곡이었습니다.

음반에 포함된 노래들을 편곡하고, 녹음을 총지휘하는 일은 ‘사랑과 평화’의 키보드 주자인 김명곤 형이 하셨습니다. 김명곤 형은 80년대에 국내 1,2위를 다투는 편곡자로서 뛰어난 감각과 키보드 연주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요. ‘다시 만난 날’ 중간 부분의 피아노 간주, ‘은아 안녕’의 색소폰 연주 등은 노래를 살려주는 뛰어난 감각이었습니다.

‘그대로 그렇게’ 도 리메이크하여 녹음했습니다. 느리게 키보드 위주로 된 반주위에 이명훈 군의 노래가 깔리는데 좀 허탈한 기분이 드는 듯한 새로운 느낌을 주었지요.

이 음반의 녹음은 장충체육관 근처의 장충 스튜디오에서 했는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좋은 장비를 갖춘 스튜디오였습니다. 녹음 기법도 많이 달라져서, 16 채널을 썼던 걸로 압니다. 서로 다른 두 녹음 내용을 연결시키는 것도, 78년 해변가요제 음반 제작 때처럼 테이프를 잘라 이어붙이는 방식은 쓸 필요가 없이, 그냥 재생을 해 가면서 다른 테이프의 내용으로 자동 전환시키는 방법을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 음반을 제작하고서 이명훈 군은 Fevers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키보드와 드럼, 기타를 새롭게 영입했는데, 모두 저희보다 나이가 좀 더 드시고 경험이 많으신 형님들이었고, 베이스에 군에서 제대한 문장곤 군이 합류하여 연주했습니다.

이명훈 군은 제게도 키보드 주자로 함께 하자고 권유를 했지요. “군대 있는 동안 연주를 하지 않아 녹슬었는데 뭐하러 나를 끌어들이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음악적인 머리가 있어 녹슬은 것이 금방 없어질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때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고 그래서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부를 하고 싶었고 유학을 가는 쪽으로 거의 마음을 굳힌 때라서 그 권유를 받아들이지 못했지요.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베이스로 들어온 문장곤 군도 조금 활동하다가 팀을 그만두게 되어, 다른 사람으로 베이스를 교체하였습니다. 그만 두게 된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본인 얘기로는 군대생활동안 베이스를 잡지 않다가 연주를 하니 그 연주가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고 하네요. 자신의 연주가 맘에 들 때까지 하루에 20시간 씩 연습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구축된 Fevers는 이제 프로의 길로 들어선 그룹사운드가 되어 여러 군데의 무대를 뛰며 연주를 하였습니다. 동대문, 종로 3가, 성남시 등등 여러 군데를 뛰었던 걸로 기억이 나며, 저도 자주 함께 가서 음악을 듣곤 했습니다.

당시 Fevers의 연주는 Rock’n Roll 쪽이 많았는데, “Hungry For Love”라든지 “Surfin’ USA” 등 노래들은 원곡보다 잘 부르고 연주했다고 느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 무렵 이명훈 군은 무대를 전후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화려한 무대 매너를 보여주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특히 마이크스탠드를 통째로 들고 무대 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마이크스탠드를 잡고 눕혔다 세웠다 하며 노래하는 제스츄어를 많이 보여 주었는데, 당시에는 새롭고 참신했으나, 이후 많은 가수들이 똑같은 제스츄어를 많이들 하는 바람에 좀 지난 후에는 더 이상 하지 않더군요.

이 무렵에는 젊은이들을 위한 고정 TV 프로가 있어서 TV 활동에 좀더 숨통이 트였습니다. MBC의 영 11, KBS의 젊음의 행진 등은 대학생이나 중고생들이 아주 좋아하던 프로그램이었고, 주말 황금 시간대에 편성이 된 생방송이었습니다.

이러한 프로들에는 가요제 출신 그룹이나 중창, 솔로들이 많이 출연하였고, Fevers도 여러 번 출연을 하였지요. 그냥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고, 출연자들이 간단한 촌극 같은 것도 했는데, 연극영화과 출신의 이명훈 군은 연기도 아주 잘해서 인기가 꽤나 높았습니다.

그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곡들은 ‘비련’, ‘고추 잠자리’, ‘잊혀진 계절’, ‘스물하나의 비망록’, ‘가슴앓이’, ‘참새와 허수아비’, ‘잃어버린 우산’, ‘어쩌다 마주친 그대’, ‘빗물’, ‘회상’ 등 여러 곡이 있었는데, 이 사이에서 이명훈 군의 ‘얼굴 빨개졌다네’ 도 큰 히트를 하였고, 1982년 연말에는 각 방송국의 신인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가요제를 통하여 데뷰한 것은 1978년인데 1982년에 신인상을 탔다는게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축하할 일이었지요.

1982년에 Fevers라는 그룹으로 시작을 했지만, 세상에는 이명훈이라는 가수의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명훈 군은 이제 완전히 솔로로 전환하여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 수상한 신인상은 그룹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독립된 하나의 가수로서 신인이라는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지금도 가끔씩은 그 해에 문장곤 군이나 제가 계속 함께 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하나의 전문 키보드 연주자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아직도 의심스럽지만, 함께 했더라면 저의 음악적 식견도 많이 발전했을거라는 생각은 드네요. 문장곤 군은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을 것이구요. 그보다도 Fevers라는 이름을 좀더 오래 간직하고 활동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18. 각자 따로 걸어가는 길

 

1982년 말 신인상을 수상한 이명훈 군은 1983년 들어 새롭게 음반을 준비하였습니다. 타이틀 곡은 ‘님타령’이었는데, 얼마 전 확인해 본 결과 하덕규 씨의 작품이더군요. 이 곡도 방송에 자주 나왔는데, 전년도의 ‘얼굴 빨개졌다네’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님타령’이란 제목과 내용이 좋았는지 아니면 국악 풍의 노래가 맘에 들었는지 이명훈 군은 그 뒤로 ‘님타령Ⅱ”, ‘님타령Ⅲ’등을 작곡하여 발표하게 됩니다.

문장곤 군은 독자적으로 베이스 수업에 전념하면서 실력을 쌓아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문장곤 군은 컴퓨터 음악을 배우러 일본에 가서 그쪽 음악도 공부를 했는데, 코드를 잡는 방법이라든지 기타 여러가지 면에서 다른 점이 많다고 하네요. 컴퓨터 음악의 시초라고 하는 MIDI (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도 일본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80년대에 일본에서 컴퓨터 음악을 공부한 것은 매우 일찍 그 분야에 눈을 뜬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드럼을 치던 송용섭 군도 건아들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다시 ‘정사품’이라고 하는 그룹에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정사품’시절은 기타를 쳤던 김흥수 군과 함께 했는데, 그 그룹에서 베이스 치던 사람이 나중에 저와 미국에서 만나는 일이 벌어졌었죠.

1979년 앨범에서 기타를 치던 박호준 군은 ‘동서남북’이란 그룹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을 하다가 음악 공부를 더 하고자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영화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다른 형태로 음악활동을 하던 것에 비해, 저는 Computer Science 공부를 하고 싶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Arkansas 주 (당시 Clinton 전 대통령이 주지사였음)와 Louisiana 주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일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였고, 이명훈 군을 만난 것은 1987년의 일이었습니다.

1987년은 잘 아시겠지만 정치적으로 숨가쁘게 돌아가던 해였지요.

연초부터 데모와 이에 대한 진압, 고문치사사건 등으로 혼란스럽게 시작하여, 개헌논의와 4.13 호헌조치가 있었으며, 이는 전국적인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로 6.29 선언이 있었으며, 16년 만의 대통령선거가 연말에 치러졌지요.

7월에는 충남 서천에 하루밤 600 mm의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는데, 6.29 선언으로 데모를 중지한 많은 대학생들이 수해복구 봉사활동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600 mm의 폭우는 얼마전 있었던 대전의 50cm 폭설과 맞먹는 양이었고 하늘이 가득하도록 비 또는 눈이 퍼부어지는 것이었는데, 저는 우연히도 그 두 사건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였습니다.

음악 분야에서는 조용필, 전영록, 구창모, 김학래, 이선희 등의 솔로 가수들과 해바라기, 수와진 등의 중창, 그리고 송골매, 이치현과 벗님들의 그룹의 활동이 두드러졌습니다.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에 와서 보니, 다른 멤버들은 모두 연락이 되지 않았고, 이명훈 군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명훈 군은 ‘너만을 사랑하고 싶다’ 음반의 녹음을 모두 마치고 음반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요. 음반표지의 제작을 또다른 배명 동창생인 김영걸 군이 담당했다고 하더군요.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있던 이명훈 군의 집에 열심히 드나들며 그 음반에 포함될 노래들을 함께 듣고 음악 얘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때는 한번 만나면 이명훈 군 집에서 밤을 새며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얘기했는데, 한번은 아침에 방에서 나오신 이명훈 군 어머님께서 잠을 못 주무셨다고 야단을 치시더군요. 밤에 저희 둘이 있는 방에서 갑자기 큰소리가 나서 ‘이 놈들이 싸우나’ 하고 나와 소리를 들어보시면, 잠시 후에는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다시 들어가 주무시려고 하면 또 큰 소리로 떠드는 소리가 나고, 또 나와 보시면 웃는 소리가 들리고…

이렇게 서너번 나왔다 들어갔다 하시다보니 새벽이 되었다고 합니다. 밤새 저희는 음악 관련 토론을 한 것인데, 어머님만 괴롭게 해드린 것이지요.

당시 준비하던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대부분 이명훈 작사 작곡이었는데, 곡 하나하나마다 느낌이 살아 있어서 작곡자로서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대, 마지막 춤을’, ‘그녀’ 등이 귀에 쏙 들어왔고 ‘너만을 사랑하고 싶다’라는 노래도 사랑에 대한 절규를 담은 애절함을 잘 표현한 곡이었습니다. 그리고 ‘님타령Ⅱ’라는 곡은 도입부분을 창으로 시작하여, 빠른 곡이 이어지다가 중간 간주는 가야금 애들립이 들어가는 기묘한 곡이었습니다. 남들 하지 않는 시도였는데, 참 재미있더라구요.

제가 가장 좋아한 노래는 ‘사랑은 어디에’라는 곡이었는데, 원래 ‘하늘’이라는 노래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에선가 제목과 가사를 바꾸었다고 하며, 예전에 했던 ‘산’과 비교될 만큼의 대곡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용하게 아침이 시작됨을 알리다가 한 옥타브 올려 깨어진 구름사이로 햇살이 내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이 나오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지요. 동해바다 같은 곳에서 홀로 아침을 맞을 때 이런 기분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명훈 군은 창을 배우고 발성연습을 다시 해서, 이전의 미성과는 아주 다른 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단단하여 노래를 부를때면 귀가 아파 옆에 앉아 있기 곤란했고 거실에서 유리창을 모두 닫고 노래하면 유리창이 징~ 하며 울릴 정도였지요. 친구들과 함께 한강 고수부지에가서 노래를 한 적도 있는데, 강한 목소리가 강 너머까지 퍼져가는 것이 정말 듣기 좋았습니다.

그 시절 함께 음식점에서 4명이 술을 마시는데, 좀 이상한 방법으로 마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1인당 1병씩만 마시기로 했거든요.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마시면 누가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니까, 1인당 1병씩 가지고 자기 잔을 각자 자기가 채워 마시기로 한 것이지요. 다 마시면 그냥 나가기로 하고.

모두들 1병 가지고는 모자란 사람들이니까 모두 자기의 술을 아껴 마시는 분위기가 되니까 술마시는 자리가 좀 이상해 지더군요.

“어, 명훈아 너 술잔 비었네. 네가 따라 마셔라” 라든지

“자 건배, 원샷 !” 하고는 남들은 얼마나 마시는지 눈치 보고 있다가 중간에 내려 놓고는

“어, 너는 많이 마셨구나. 참 아깝겠다” 라면서 놀린다든지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거기서 압권은 이명훈 군이 실수로 자기 술병을 쳐서 술을 반병이상 엎질렀거든요. 그걸 부지런히 손으로 쓸어담아 손가락에 묻은 것을 빨아먹는다든지, 남들 술마시는데 옆에서 “맛있어?”하면서 불쌍하게 쳐다본다든지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1987년 여름은 이명훈 군과 자주 만나서 음악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헤어져 있던만큼의 기간동안 변화하고 발전한 모습을 확인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재기를 꾀하는 이명훈 군의 모습은 이제 예전의 앳된 미소년의 모습에서 무게가 있는 모습으로 변모하였고, 목소리나 작곡실력이 전에 비해 크게 진보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학을 마치고 그가 준비한 음반에 수록된 좋은 곡들이 모두 크게 히트하기를 바라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9. 그 후…

 

1987년 새 앨범을 발표한 이명훈 군은 ‘너만을 사랑하고 싶다’, ‘왜그래’ 등의 노래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밤무대에서도 노래를 하고, TV나 라디오, FM 방송 등 여러 군데 출연을 했지요. 한동안 활동을 쉬고 있던 터라 궁금해 하던 팬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이명훈 군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명훈 군은 ‘너만을 사랑하고 싶다’라는 노래를 가장 좋아했고 그 곡으로 주로 많이 불렀는데, 팬들로서는 오랜만에 대하는 이명훈 군의 노래가 그 노래의 도입부에서와 같이 거친 소리로 시작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수로서 이전보다 더 성숙되고 노래들의 수준도 높아진 것에 비해, 그 음반은 덜 알려져서 지금까지도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1989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다시 한국에 와서 이명훈 군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 받으신 명훈 군 어머님 말씀.

“요즘 맨날 방에 틀어박혀서 기타치며 맨날 머리 잘랐댄다. 이건 미장원도 아니고 무슨 머리를 그렇게 자르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와서 확 좀 잘라줘라.”

개나리 아파트에서 이사한 상계동의 이명훈 군 집에 가보니, 새로운 음반에 수록될 곡들 중 ‘어제 머리를 잘랐어요’를 가다듬고 있는 중이더군요. 그와 함께 준비하던 곡들이 ‘하와’, ‘님타령Ⅲ’, ‘떠나가는 너에게’와 같은 곡들이었습니다. 모두 이명훈 군의 곡들이었는데 1987년에 느낀바와 같이 작곡 실력이 한층 더 발전했고 다양한 형태의 노래를 소화하는 능력도 나아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작곡자가 직접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목소리가 노래에 맞으면, 그것이 가장 적합한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노래 만들 때의 세세한 느낌들을 모두 살려낼 수가 있지요. 다른 사람이 부를 때면 아무래도 감정의 전달이 덜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가 만든 노래를 남이 부를 때면 연습 때나 녹음실에서 녹음할 때, 각 부분의 감정 변화를 꼭 다시 일러주곤 합니다. 그런데 작곡자가 직접 부르면 그런 일이 필요 없겠지요.

역시 1987년의 여름처럼 이명훈 군의 집에 여러 번 찾아가며 노래를 듣고 음악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녹음을 마쳤던 1987년과 달리 이때는 녹음을 진행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에, 주로 이명훈 군이 노래하는 것을 들으며, 조금씩 달리 불렀으면 하는 부분 등 얘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녹음을 할 때 녹음실에도 쫓아갔고, 노래하는 바로 옆에 앉아서 제가 듣고 느낀 바를 알려주었습니다. 골프선수 옆에 있는 캐디처럼, 연습할 때의 소리와 녹음하는 소리를 비교하며 알려주는 사람이 있으면 노래할 때 도움이 되지요. 그런데, 1987년 때 만큼 자주 찾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저에게도 바쁜 일이 있었거든요.

제게는 1987년 여름 만났다가 헤어졌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헤어지고 미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생각이 났고, 그러다가 ‘너를…’ 이라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1989년에는 이명훈 군도 그 곡을 함께 불러 보았지요. 그 노래를 이명훈 군에게 들려주고 부르고 하던 시절,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죠. 그리고, 한 달 이상 매일 만난 끝에 장래를 약속하고는 그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좋아하더군요. 지금도 가끔 피아노 치며 들려주곤 하는데, 아직도 약발이 먹힙니다. 히히

결혼 후 신혼여행 다녀와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양가와 친척들에게 인사 다니느라고 이명훈 군을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1987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음반이 잘 되기를 기원하면서 떠나는 수 밖에 없었지요.  그후 1989년에 준비하던 음반은 무슨 이유에선지 1991년이 되어서야 완성이 되었음을 우연히 알게되었습니다.

1992년 봄. 저는 한국으로 돌아와 대덕연구단지에서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한국에 와보니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 이경규의 ‘몰래카메라’, 그리고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노래 등이 인기를 끌었고, 이어서 댄스음악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등의 음악이 TV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곡이었지요.

대전에 살다보니 서울에 있는 친구들 찾기가 쉽지 않았고, 문장곤 군은 계속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였으며, 이명훈 군도 집을 이사하여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연락을 할까 난감했지요.

1년 반이 지나서 우연히 서울 출장을 가서 버스타고 양재동을 지나다가 눈에 익은 약국을 발견했습니다. 이명훈 군의 작은 누나가 경영하던 곳이었는데, 그때도 그 자리에 같은 이름으로 있더라구요. 순간적으로 그 약국의 전화번호가 떠오르더군요. 번호가 특이하여 예전에 외웠던 것인데 갑자기 반짝하고 떠오른 것입니다. 번호가 바뀌지 않았기를 기원하며 전화를 했더니 작은 누나가 전화를 받으시더군요. 그래서 이명훈 군 연락처를 알고 연락하여 만난 것이 1994년이었습니다.

그때 이명훈 군은 기획업무라는 새로운 일을 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제가 연락하기 전 이명훈 군과 문장곤 군은 어떻게 알았는지 서로 연락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문장곤 군도 함께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문장곤 군은 컴퓨터 음악을 배워 포이동에 ‘아이소리’라는 스튜디오를 차리고 운영하고 있었으며 각 방송국에 들어가는 음악 및 음향 제작과 함께 여러 가수들의 음반 제작도 맡고 있었습니다. 초창기 윤도현 밴드도 그 중 하나라고 하네요.

1975년부터 시작하여 함께 음악활동하던 세 사람이 다시 만났으나, 모두들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명훈 군은 기획사 일을 하고, 저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문장곤 군은 음악 관련 일이었지만 직접 무대에 서는 일은 아니었지요. 그저 우리는 가끔씩 만나서 서로 일이 잘 되어가는지 묻고 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다시 뭉쳐 음악을 할 수도 없었지만, 한다고 해도 댄스음악이 주류를 이룬 그때에 그룹사운드는 설 곳이 없었습니다. 그냥 아쉬움을 가슴 속에 담고 각자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밖에 없었지요.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문장곤 군은 제가 서울에 일이 있어 갈 때 가끔씩 만났습니다. 스튜디오를 찾아가면 항상 일하고 있었으니까 만나기가 쉬웠지요. MIDI를 사용하여 음악을 만드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저의 연구소 프로젝트 결과를 홍보하는 CD 만들때 문장곤 군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명훈 군은 좀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본인 말대로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보니, 연락이 잘 안되었지요. 가끔씩 “나 대전에 왔는데 만나자.”라는 전화를 해서 대전에서 두세 번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세명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2000년 이명훈 군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와 2001년 12월 저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지역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힘들게 일하는 몸들이었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는 꼭 찾아준다는게 고마웠습니다.

가끔씩 얼굴 잊지 않을 정도로 한번씩 보고 하며 지내던 중 저는 또한번 “나 대전에 왔는데 만나자”라는 이명훈 군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2004년 1월 11일. 일요일이었고 마침 그때 저는 성당의 청년밴드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기에 그 일을 마치고 약 2년만에 이명훈 군을 만났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했는데, 정말로 오랜만에 ‘그대로 그렇게’와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을 노래방 반주기에 맞추어 함께 화음 넣어 불렀습니다.

그날 이명훈 군이 얘기를 하더군요. 설 연휴에 열린음악회가 있는데, 옛 가요제 출신 그룹사운드들이 출연한다고

그러면서 덧붙인 얘기는,

“친구야. 우리 오랜만에 함께 무대에 서 보자. 지금 했던 것처럼 나란히 서서 함께 노래하자.”

그러면서 제 손을 꼭 잡는 친구의 손을 저도 꼭 잡았습니다. 25년 만에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서게 되었다는 것은, 젊음의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우리들에게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20. 열린 음악회와 까페 “그대로 그렇게”

 

2004년 설날 특집 열린 음악회에서 7080이란 이름으로 그 시대의 그룹 사운드를 초대했습니다. Fevers 이름으로 참으로 오랜만에 무대에 다시 설 기회가 주어졌으나, 막상 연락이 되어 모일 수 있는 사람은 이명훈, 문장곤, 정원찬 3명 밖에 없었습니다. 베이스와 키보드 그리고 노래만으로 그룹사운드의 음악을 할 수 없기에 좀 난감했지요. 그런데, 문장곤 군이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내 놓았습니다.

문장곤 군은 2년전부터 Fevers Junior라는, 자신의 아들과 그 친구들이 만든 그룹사운드를 길러왔습니다. Fevers Junior가 뒤에서 반주를 하고 왕년의 fevers 셋이 앞에 서서 노래를 하자는 문장곤 군의 아이디어에, 모두 찬성했습니다.

먼저 Fevers Junior가 ‘그대로 그렇게’와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을 맹렬히 연습했습니다. Fevers Junior가 연습을 마치면 우리와 함께 맞추는 연습을 연습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명훈 군은 부산에, 문장곤 군은 서울에, 저는 대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연습 시간을 맞추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결국, 일요일에 제가 와서 Fevers Junior와 연습을 하고, 그 다음에 이명훈 군이 따로 연습을 맞추는 것으로 했지요.

Fevers Junior를 처음 만나던 날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용휘, 이민형, 이범섭, 박수연, 김지환, 문지환, 김주형(당시 임시멤버?)으로 이루어진 Fevers Junior는 20대의 풋풋한 젊음과 함께 탄탄한 음악 실력을 갖추고 있는 수준 높은 팀이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대부분 와 있었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멤버도 있었습니다. 제가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도 연습에 꼭 늦는 멤버가 있었는데, 늦는 사람은 꼭 신경질 내며 들어오더라” 라고 했지요.

아무래도 늦으면 미안하니까 ‘서울의 교통이 문제’라든지 ‘집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누가 전화를 해서 그랬다’든지 하면서 기분 나빴다는 표정을 짓지요. 그러면 아무래도 남들이 덜 나무라거든요.

그런 얘기하고 있는데 늦게 도착한 Fevers Junior 멤버가 툴툴거리며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본 김용휘 군이 “쟤도 신경질 내며 들어오네요. Fevers 전통인가 봅니다.” 라고 하여 웃었습니다.

Fevers Junior와는 재미있게 연습을 하였고, 화음 연습도 함께 하였습니다. 각자의 실력이 탄탄했고, 연습벌레 문장곤 군의 지도로 맹연습을 한 팀이라, 참 잘들 하였습니다. 저는 정말로 오랜만에 그룹 연습을 하며 감개무량하더군요.

2004년 1월 20일은 열린음악회 특집 7080 그룹사운드 녹화일이었는데,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서울로 올라와 KBS 홀에서 이명훈 군과 문장곤 군, 그리고 Fevers Junior 들을 만났고, 오후 내내 무대 연습과 카메라 리허설을 했습니다.

연습을 하면서 방송국이 많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PD 한 명에 심부름하는 사람 한두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열린음악회 녹화를 보니 책임 프로듀서는 객석에 있고, 많은 보조 PD들이 일을 나누어 맡아 자신의 일을 처리하더군요.

카메라 팀과 조명 팀, 사운드 조절 팀도 지휘하는 사람 한 명씩과 이를 보조하는 여러 사람이 일을 나누어 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녹화 진행에서도 대기실에서 시간되면 출연자들 내 보내는 사람, 출연자들이 해당 위치로 가서 준비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사람, 마이크 높이만 전문적으로 맞추는 사람 등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 공연은 많은 그룹사운드들이 출연하는 음악회였기 때문에 이동식 무대가 3개 준비되었습니다. 한 팀이 연주하고 있을 때 다음 팀은 다음 무대에 올라가 준비하고 있다가 앞 팀의 연주가 끝나면 이동하는 무대와 함께 바로 연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옛날 같으면 무대가 하나 뿐이라, 한 팀 연주 마치고 다른 팀 올라와 준비하고 사운드 맞추고 하면, 연주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겠지요.

연습하고 기다리고 하면서 함께 출연하는 다른 그룹들과 만나 인사도 하고 옛날 이야기도 했지요. 모두들 나이가 들어 중년 아저씨 같은 모습들이었으나, 오랜만에 해보는 방송 출연에 약간씩 들떠 있었습니다.

7080 그룹사운드 특집에 특별히 사회자로 초청된 배철수 형도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이었지요. 같은 해변가요제 출신이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금새 알아보시고 반가와 하시더군요.

또한 Black Tetra, Oxen 80, Linus, Locust가 모여서 만들었다는 B.O.L.L 이라는 팀이 있었습니다. 모두 사회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모여 연습을 하고 공연을 한다고 하더군요. 공연은 구청의 구민회관 같은 곳에서 많이 하는데, 수익금을 모두 결식아동 돕기를 위해 내놓는다는 얘기가 감동적이었습니다.

모든 팀이 갖가지 가요제에서 입상한 경험이 있기에, 저희는 대기실에서 “가요제에서 노래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기분이다”라고 하기도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녹화 끝나면 함께 어딘가로 이동하여 술 한잔 하기로 했습니다. 모두들 젊은 시절 음악에 미쳐 활동을 했고, 오랜만에 무대에 올라 옛 기억을 되살리는 흥분된 상태였기 때문에, 밤새도록 함께 얘기를 해도 모자랄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7시 30분.

녹화가 시작되고 저희 차례가 되어 Fevers Junior는 뒤의 이동 무대에 있고, 이명훈, 문장곤, 정원찬 3명은 무대 앞쪽으로 걸어나갔습니다. 보통, 무대는 밝게 객석은 어둡게 해 두기 때문에, 무대에 서면 객석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열린음악회는 객석도 환하게 해 두어, 객석에 앉은 관객들의 표정을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 나가 그 관객들의 얼굴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마음 한 구석이 찡하게 울려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저와 비슷한 나이의 중년분들이고, 일반적으로 그 연령층은 굳은 얼굴표정으로 무게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들의 얼굴은 가득 웃음을 띄우며 정말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에 가득찬 모습들이었습니다.

“아, 이 분들이 정말로 행복해 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왔고 동시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처음 방송 출연 얘기를 들었을 때는 단지 친구들과 오랜만에 무대에 함께 선다는 것에 재미있겠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그분들의 표정을 보고는 저희가 무슨 보람있는 일을 하는 것 같은 행복감이 밀려온 것이지요.

그 행복감을 갖고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관객들의 표정을 최대한 많이 보아 두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 분들의 모습이 모두 저희에게 기쁨으로 전해져 저희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2시간도 안되는 녹화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70년대 같으면 1시간 20분짜리 프로그램 녹화하는데 3시간 넘게 걸렸을텐데, 방송 진행 시스템이 완벽해서 그런지 거의 생방송 정도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기실에서는 모든 팀들이 지루한 줄 모르고 남의 연주를 들으며 즐거워 하였지요.

녹화를 마치고 보니 밖에는 세찬 바람과 함께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맑은 날씨였는데, 녹화가 시작될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더군요.

출연자들끼리 어디 가서 한 잔 하기로 한 것은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고, 모두 뿔뿔이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야 한없이 컸지만, 눈보라 속에 차들이 시속 20km 정도로 설설 기어가고, 차를 잡기도 힘드는데 함께 어디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저희 그룹도 문장곤 군과 Fevers Junior는 연습실로, 이명훈 군은 강남으로, 저는 여의도에 근무하는 친구를 찾아서 각자 헤어져 갔습니다. 30년 전에 만나 뜻을 합쳐 음악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25년 만에 한 무대에 서서 함께 노래했는데, 다시 함께 했던 시간이 너무 짧았고, 그 행복했던 시간에 비해 너무 아쉬움 많고 허무하게 헤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명훈 군, 문장곤 군과 함께 악수를 하며, “이제 좀 자주 연락하며 지내자”라고 했습니다만, 속으로는 ‘또 1년에 한번 정도나 전화가 오려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 연휴 전날 눈보라치는 차가운 밤 거리에서, 헤어지는 친구들의 웅크린 뒷모습들이 안타까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귀성객들 틈에 섞여 대전으로 내려와 KBS 열린음악회 인터넷 게시판을 열어보니 벌써부터 공연을 본 사람들의 글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1월 25일 방송이 나간 후부터는 열린음악회 게시판의 대부분이 7080 중년층 세대가 올린 글로 도배되었습니다. 방송 후 1주일 만에 약 1천 개의 글들이 올라왔는데, 그 연령층에 컴맹이 적지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 3월 말까지 약 8주 동안 약 400개의 글이 올라온 것과 비교해 보면, 그 당시 얼마나 폭발적인 호응이었는지 알 수 있지요.

게시판에는 방송을 보신 분들의 글들도 많았지만, 방송을 보지 못한 분들의 아쉬움도 많았습니다. 거센 재방송 요청에 KBS에서는 이례적으로 재방송을 편성하고 1월 31일 토요일 오후에 재방송을 내보냈습니다.

그 글들에 나온 말들 중 가장 많았던 내용들은,

“옛 추억이 생각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가요제 출신들이어서 그런지 세월이 지났어도 실력들이 아직 남아있다.”

“고정적으로 이런 프로를 만들자.”

“젊은 음악 아니면 모두 트로트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우리도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 들을 권리가 있다.”

“조금 보고 있으려니 아이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라.”

“나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고, 그 방송을 보며 앞으로 더 씩씩하게 살아갈 힘을 얻었다.”

이런 내용과 함께, 학생들이 올린 글 중

“부모님이 TV를 그렇게 열심히 보시는 것 처음 봤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 글들을 보면서 저는 KBS홀 관객석에서 보았던 그 분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전국에서 그 방송 보시던 분들의 얼굴이 그렇게 행복하고 환한 얼굴이 아니었을까요?

열린음악회 게시판에는 Fevers에 대한 글도 많았습니다. 저는 그 글들을 모두 읽었는데, 특이한 글이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이명훈 님이 좋아서 팬클럽에 가입하고 싶다”는 글과 그 댓글로 “’다음’에서 ‘그대로 그렇게’라고 치면 나오는 까페가 있다”는 글이었습니다.

호기심에 ‘그대로 그렇게’ 까페를 찾아가 보았고, 그냥 글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회원 수가 10명 남짓한 까페였지요. 그 날은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둘러보다 그냥 나왔습니다.

다음 날 ‘그대로 그렇게’ 까페를 다시 찾아가보니 “정원찬 이란 분이 다녀가셨어요”라는 글이 올라와 있더군요. ‘그대로 그렇게’ 작곡자인지 모르겠다면서…

까페에 등록을 하고 까페 주인장과 대화를 했습니다. 까페 주인장은 2003년 여름부터 까페를 만들고 언젠가는 이명훈 군이 이 까페에 찾아올 거라고 기다리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명훈 군과 문장곤 군에게 알리고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 기뻐하던 주인장의 모습 (사실은 대화창에서의 글)이 잊혀지지 않네요.

다음 날 이명훈 군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리고 까페에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문장곤 군은 스스로 알고 잘 찾아왔더군요. 이렇게 우리 세 명은 ‘그대로 그렇게’라는 까페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인장과 회원들 모두 기뻐하던 것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까페의 회원수도 많이 늘고, 서로를 알리는 글도 많이 오고 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음악을 기억해주며 25년을 기다려 준 분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어 이명훈 군은 재기를 다짐하게 되었고, 까페 회원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현재 차근차근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25년이라는 세월도, 열린음악회 녹화 후 헤어져가는 친구들의 등을 춥게 만들었던 그 폭설도, ‘그대로 그렇게’ 까페 회원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뜨거운 열기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나 봅니다.

Fevers를 만든지 26년.

이제 전혀 다른 형태의 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저희가 했던 음악은 일부 사람들의 먼 기억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할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저희가 했던 활동은 철없었던 그러나 순수했던 열정뿐이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KBS 홀 관객석에 앉아 손뼉치며 노래를 따라하시던 분들의 행복한 얼굴들,

1주일만에 올려진 천 여 건의 글들, 특히, ‘방송을 보며 힘을 얻었다’고 하신 글,

‘그대로 그렇게’ 까페에 모이신 여러분, 그런 모습들은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와 저희 음악이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무대에서 노래와 연주를 하며 여러분들게 음악을 들려드렸지만,

이제는 그 음악이 메아리되어 저희에게 되돌아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메아리는 아주 커다랗게 증폭되어 저희 가슴에 자리잡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